신동숙의 글밭(158)
때론 거친 숨으로, 그리고 언제나 평화로운 숨으로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숨을 스스로 쉴 수 있다는 것은 바람의 흐름처럼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영역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숨쉬는 일에 타의적으로 침해를 받아 숨이 끊어진 타살로 이어진 일이 최근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와 한국의 9살 남자 아이가 죽어가던 고통은 마음껏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경찰관의 무릎에 목이 눌려 숨이 끊어져 가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던 말은 "I can't breathe."였습니다. "나는 숨을 쉴 수 없다.", 계모의 학대로 9살 남자 아이의 몸이 갖힌 곳은 나중엔 더 작은 44cm·60cm의 여행 가방이었습니다. 아무도 아이의 마지막 말을 들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매 순간이 고통의 걸음입니다. 그들의 숨이 끊어져 가던 순간은 도저히 평범한 숨으로는 상상해 볼 수 없는 고통입니다.
남해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엄마에겐 천식이 있었습니다. 세 살 때 홍역에 걸렸었는데, 열을 풀지 못하여 천식이 되었다는 얘기를 엄마는 종종 하셨습니다. 엄마에게 숨은 가슴보다는 목구멍에 더 가까이 붙어있었습니다. 들숨날숨마다 쌕쌕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좁다란 길을 빠져나올 때 들려오는 한 오라기 바람의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실오라기의 비명소리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 하염없는 갑갑함을 헤아리기엔 저의 숨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살아서 숨을 쉰다는 일이 곧 죄를 짓는 일처럼 여겨지던 10대와 20대를 보냈습니다. 숨쉬는 일이 죄가 되는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은, 재미가 아닌 삶의 의미를 찾는 일뿐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엄마의 천식 발작이 심하게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숨을 마음껏 쉴 수 없는 고통이라 하여 하늘의 숨, 하늘에 달린 목숨, 천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밤새 엄마는 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하시고, 아지랑이 같은 몸짓으로 이불을 고아 작은 언덕을 만드시는 모습을 숨 죽이고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어린 저는 감기는 눈이 무거워 잠에 들었다가 깨었다가 그렇게 밤을 하얗게 새었습니다. 그 이불 언덕에 맥없이 기대신 몸에선, 들숨날숨이 실처럼 가느다란 길을 지나며 생사의 경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불만 들썩여도 거미줄처럼 곧 숨줄이 끊어질 것만 같았던 엄마의 고통스러워 하던 모습을 밤새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초3이었던 동생은 소리없이 방바닥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입에서 새어나온 말이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저에게는 바로 눈 앞에 있으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엄마의 고통 앞에서 밀려드는 무력감이 깊은 사유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살아서 숨쉬는 이유와 의미를 찾는 일이 제가 붙든 생의 끈이 되었습니다. 숨줄을 붙드는 것보다 숨줄을 놓는 일이 더 평안했을 엄마의 멈춘 시간 동안에, 평안의 줄보다 고통의 줄을 붙들 수 있었던 안간힘은 어린 자식들이었습니다.
어렵게 숨줄을 붙들고 살아오신 엄마에겐 살아오신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도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행여나 자식에게 누가될까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선한 마음을 내셨습니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죄를 짓는다는 그런 순전한 마음이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남동생이 중학교 교실에서 키우다가 가져온 작은 화분의 식물을 30년 가까이 지금까지도 아파트 창가에서 살려 오시며 해마다 꽃을 피우시는 정성으로 한결같은, 무릇 마음을 지키며 살아오신 삶입니다. 달항아리와 막사발과 수묵화에 깃든 여백의 미를 하늘처럼 우러러보았던, 우리네 선조들의 삶은 이미 말과 글과 종교와 경전이 있기 이전부터 그러하였음을 봅니다. 유구한 역사의 강물 가장 밑바닥으로 유유히 흘러온 순전한 하나의 마음입니다.
기도의 엄마가 자녀들에게 했던 말은, '내 자식이 소중한 만큼 넘의 자식도 소중하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는 원리와 삶의 원칙을 스스로 지니며 살아오셨습니다. 선한 양심입니다. 숨쉬는 일처럼 양심은 우리 안에 이미 있는 하나님이 주신 공평한 자유의 영역인 것입니다. 글을 아는 이나 모르는 이나, 이방인이나 누구에게든지 선물처럼 주어진 공평한 자연의 영역인 것입니다.
살아서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은 평범하지만, 어찌 보면 숨쉬는 매 순간이 특별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든 가장 좋은 숨쉬기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숨쉬기일 것입니다. 숨이 거칠어지면 몸의 근육도 거칠어집니다. 이어서 마음의 결도 거칠어지게 됩니다. 경직되고 거칠어진 숨으로 마음이 휘몰아치면 그건 폭풍의 눈처럼, 폭력성으로 이어질 소지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찰관과 한국의 계모가 평화의 낮은 숨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다면, 순간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세계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자 가장 온전한 개인의 모습은, 제 자신의 숨을 평화롭게 쉬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타인의 숨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나의 숨을 평화롭게 조절할 수는 있는 일입니다. 저 한 사람의 숨이 평화로울 수 있다면, 그 평화의 숨은 가까운 사람에게로 이어지고 점점 이어져 번져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평소에 늘 생각하는 세계 평화의 첫 걸음은 이처럼 저 한 사람의 평화로운 숨쉬기가 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억압과 거짓과 거친 폭력 앞에 분노하여, 돌풍이 휘몰아치듯 거친 숨을 다함께 쉬어야 하는 일도 우리네 삶 속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소식에 들끓은 미국 시민들의 분노는 거리로 모여들게 하였습니다.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는 듯한 미국 시민들의 자유와 정의를 향한 흐름은 거대한 강줄기였습니다. 몰려 드는 시민들과 그에 대치된 군인과 경찰의 권력은 자칫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에 분노한 시민들 앞에 깊은 사죄와 애도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은 군인과 경찰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강물처럼 낮아진 마음 앞에 들끓어 휘몰아치던 시민들의 숨은 그들과 더불어 낮아지고 비로소 눈물처럼 흐르는 평화의 숨이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군중의 시민들을 향한 군인의 "한 번 안아봐도 될까요?"는 비로소 깊어진 평화와 가장 작아짐으로 가장 크고 거룩해진 사랑의 울림입니다.
저 역시 하루에도 틈틈이 자녀들과 대치되는 상황 앞에서 거칠어지려는 숨을 토해내기도 하고, 뒤늦게 밀려드는 후회의 물결에 숨결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릴 적 텔레비젼에 나오던 프로그램인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주제곡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 와-
지구는 숨을 쉰다!
그 모든 생명이 살아 있다.
눈빛이 가지 못한 세계로
살아서 숨쉬는 신비의 세계로
지구는 숨을 쉽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살아 있습니다. 언제나 바람의 자유와 자연이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살아 있는 땅입니다. 아름다운 세계로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운 숨쉬기로 모든 생명에게 자유로운 마음과 자유로운 사상이 꽃이 피어나고 흐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태초의 하나님이 사람의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던 맨 처음의 숨과 예수가 주고 가신 성령의 숨으로, 오늘도 매 순간 평화로운 숨을 쉴 수 있다면, 의식이 깨어서 그 바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바람으로 느낄 수 있다면, 허공처럼 빈탕한 마음도 비로소 충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매 순간을 깊이 바라보며 사유하면서, 이유와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뜻으로 다가오는 신비를 기도 안에서 보기를 원합니다. 저에겐 기도의 줄을 붙드는 일이 영혼의 숨줄을 붙드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숨쉬는 일이 죄를 짓는 일 같았던 20대의 터널을 지나올 수 있었던 마음 하나는, 윤동주 시인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의 마음입니다. 까마득한 그 옛날의 공자와 맹자와 석가와 예수의이 그 마음입니다. 자비와 긍휼의 마음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아픔에 함께 아파할 수 있고, 기쁨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하나는 자유와 자연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가 됩니다. 하늘의 평화로운 숨으로, 때론 거친 숨으로, 그리고 언제나 평화로운 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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