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168)
다석, 도올, 머튼, <시편 사색>을 주워서 소꿉놀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심심해진다. 한때 바깥 일도 해보았지만, 제 스스로가 이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자본과 경제 논리로 형성된 이 사회구조 안에선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나인 것이다. 물론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이 사회 안에서 있음직한 성공에 대한 꿈을 꾸어본 적 없이, 몸만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 서로가 아쉬울 것도 없는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혼자 놀기로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종종 쪽창으로 창밖을 본다. 마당 위에 하늘을 보고, 나무도 보고, 풀꽃도 보고, 새소리에 귀가 맑아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가만히 바라본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이 세상은, 자연은 참! 신기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마음이 든다. 그렇게 바라보며 숨을 쉬며 사색을 한다. 사색을 하듯이, 몸을 움직여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틈틈이 찾아오는 심심한 마음이 내겐 가장 반갑고 정겨운 벗이다. 어려서부터 늘 바라본 빈 하늘을 닮은 심심한 마음. 이 심심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고, 늘 아쉬웠다. 예전엔 문득문득 찾아오는 심심한 마음이 불청객 같았고, 가슴 쓸쓸한 고통으로 느껴졌지만, 이제는 오히려 찾아와주기를 고대하기도 하고, 늘 먼저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평소에도 누군가와의 약속 시간에 상대방이 늦어서 생기는 공백의 시간을 스스로가 즐기기도 한다. 내 천가방 안에는 언제나 책 한 권이 들어 있으니까. 그러니 어느 누구든 나와의 약속 장소에 다소 늦더래도 너무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거꾸로 입장이 바뀐 경우도 생각해본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나와 같지는 않기에 약속 시간보다는 일 분이래도 먼저 도착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 늦을 때도 있다.
하지만 심심한 마음은 시도 때도 없다. 자유다. 그렇게 놀러오는 반갑고 정겨운 벗인 심심한 마음과 같이 놀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것이다. 이 심심한 마음과 같이 놀기 위해선, 어릴 적 소꿉놀이처럼 뭔가 손에 만지작거릴만한 것이 필요했다. 땅에 뒹구는 돌멩이도 줍고, 내 몸 둘레에 흙도 슬어 모으고, 발길에 채이는 나뭇가지도 줍고, 찌그러진 깡통에 고인 빗물도 고이 받아서, 소꿉 살림을 모은 후 가만히 앉아서 심심한 마음과 같이 놀기로 하는 것이다.
그동안 혼자인 줄 알았던 호젓한 산책길에 주워 모아둔 소꿉 살림으로는 성경, 불경, 논어, 중용 등이 있다. 그냥 바람에 스치듯 겉만 스쳐왔다. 동양의 경전은 암호처럼 쓰인 한자에서 길이 막힌 것이다. 이제 막내까지 학교와 학원에 가고, 나는 이 경제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살아도 경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스스로가 잘 알기에, 이왕 앉아서 놀기로 한 김에 소꿉 동무도 여럿 두었다. 다석 류영모, 도올 김용옥, 토머스 머튼, <시편 사색>과 좋은 책들, 그리고 언제나 자연이 매일 만나는 소꿉 동무다.
이렇게 혼자인 듯 심심한 마음과 놀다 보면, 때가 되어 어느 지기가 함께 놀자고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마음 한 구석에 씨앗처럼 품고서, 안으로만 향하려는 양쪽 귀를 바깥으로도 간간히 열어두기로 한다.
참! 재밌다. 가장 기뻐하는 건 심령이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심층수처럼 한 줄기의 기쁨이 소롯이 올라온다. 배우는 기쁨, 알아가는 기쁨, 깨치는 기쁨이 빈 하늘을 채운다. 산동네 마을의 작은 모래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 옆 좁은 풀숲 사이로 작은 몸집이 쪼그리고 기어 들어가 헤매이며 주운 돌멩이와 흙과 나뭇가지를 주워서 놀던 어린 날의 소꿉놀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성공이랄 것도 이룰 것도 없는 소꿉놀이라 자유롭고 홀가분하다.
자유로워서 어디로든 깊이 궁리해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여행길이다. 그 길엔 언제나 좋은 거울과 등불이 되어 주는 길벗이 있기에. 어느 날엔 길을 잃어도 좋은 것이다. 어둠에 갇힌다 해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혼돈과 어둠의 밤을 지나서 아침이 오면 언제나 새로운 길과 빛이 나타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소꿉놀이는 햇살이 찬란히 비추는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놀이였다. 엄마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손으로 돌멩이를 줍고, 흙을 조물거려서 매일 흙구슬을 만들어도 지겹지 않고, 흙을 돋우어 새로운 길을 내고, 한 줌의 물까지 흘려 보내면, 마른 길이 냇물이 되던 소꿉놀이. 자연스러운 놀이가 되고 깨우침의 공부로 저절로 나아가는 신나는 놀이, 매번 새로운 길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걸어가는 길. 뚜벅이 걸음이다.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지금은 뛰어서 가지는 않으려 한다. 매 순간이, 매 순간의 들숨날숨이, 매 순간의 마음이, 그렇게 깨어 있는 매 순간이 오롯이 살아 있는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어차피 북극성에 닿을 수 없지만, 북극성이 거기 있기에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는 더디지만 꾸준하기를 바라는 글숲 산책길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놀다가 쉬엄쉬엄 걷다가 허물고 다시 짓는 모래성이다. 느리고 더딘 필사는 걸어가는 도보 여행, 지구별 산책길이다. 배움이 놀이가 되고, 재미가 그림자처럼 저절로 따라오는 의미의 길, 의미를 따르는 인생의 즐거운 놀이다. 의미를 채우는 일은 영혼이 좋아하는 일이라는 선현의 말이 달빛같다.
아침 설거지를 일찍 끝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미루기도 하면서, <도올의 대학>을 들으며 받아쓰기를 한다. 아침 겸 점심밥을 라면과 먹다 남은 오이와 수박과 식은밥으로 간단히 떼우기도 한다. 얼마전까지 정독한 다석 류영모의 <다석 전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필사를 해오고 있다.
오늘도 오른쪽 어깨 속에 작은 돌멩이가 생겼다. 평소 글을 쓸 때 손에 불필요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습관이 있는가 싶어서, 필사하는 내내 어깨와 팔과 손과 손가락과 팬의 힘을 요리조리 조율하며 지켜보면서 적는다. 아무리 글을 적어도 팔과 어깨가 아프지 않은 비결을 아는 분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면 참 좋겠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 재미마저도 움켜 잡으려는 순간의 욕심이 들면, 마음이 금새 돌처럼 단단해질까봐. 이해인 수녀님의 시 대여섯 편을 필사하면서 마음을 구름처럼 순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틈틈이 크게 누워서 기지개도 시원하게 켠다. 눈은 벌써 창가에 가 있다. 눈을 감아도 빈 하늘이다.
하루해는 짧아서, 박꽃이 하얗게 꽃을 피우는 저녁답이면,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오른쪽 어깨를 작은 돌덩이처럼 만들어 놓은 하루치의 소꿉놀이성도 저녁이면 허물어진다. 밤이면 달이 이지러지듯 스스로가 그렇게 허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앉아서 침묵으로, 관상 기도의 진짜 성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언제나 심심한 빈 하늘 뿐이다. 그래도 내일이면 또 소꿉 동무들을 모아서 소꿉놀이를 해야지 하는 기대감을 품고서 잠에 든다. 다음 날 다시 놀아도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심심한 마음 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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