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510)
모든 순간은 선물이다
하루 종일 일하며 흘린 땀 때문이었을까, 인우재에서 보내는 두 번째 밤, 자다가 말고 목이 말라 일어났다. 잠을 자다가 물을 마시는 일은 좀체 드문 일이었다. 물을 마시며 보니 창밖으로 달빛이 훤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대신 툇마루에 앉았다. 마루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 한 새벽이다.
보름이 지난 것인지 보름을 향해 가는 것인지 하늘엔 둥근 달이 무심하게 떠 있다. 분명 대지를 감싸는 이 빛은 달일 터, 그런데도 달은 딴청을 부리듯 은은할 뿐이다. 어찌 이 빛을 쏟아놓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눈부시지 않는 것일까, 세상에 이런 빛의 근원이 있구나 싶다. 그런 달을 연모하는 것인지 별 하나가 달에 가깝다.
누가 먼저 불러 누가 대답을 하는 것인지 소쩍새 울음소리가 이 산 저 산 이어지고, 봄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량이 작아진 개구리 울음소리가 잔잔하다. 오케스트라 심벌즈 울리듯, 짐승인지 새인지 구분하기 힘든 기괴한 소리도 간간이 이어진다.
어둠 속 달빛에 취하고 잔잔한 소리에 취해 있을 때 느닷없이 나타난 파란 빛의 춤, 반딧불이었다. 깜박깜박 불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어둠 속을 난다. 여기서 빛이었는데 잠깐 사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다 싶은데 잠깐 사이 빛으로 나타나고, 그야말로 반딧불은 광속으로 날고 있었다. 혼자만의 춤이 아니었다. 어둠은 하나의 무대, 망초 무성한 앞마당에서 달빛에서 벗어나 먹물처럼 컴컴한 숲속에서 함께 춤추는 군무(群舞)였다. 은빛 물결로 쏟아지는 달빛을 따르는지, 해맑은 소쩍새 노래를 따르는지 한없이 자유로운 빛의 춤이 어둠을 수놓았다.
가만 일어나 마당에 섰다. 마침 다가오는 반딧불이 있어 손을 내민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손 안으로 드는 반딧불, 손을 축복하듯 서너 번 손을 밝히더니 다시 날아오른다. 구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마주한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다.
다시 돌아와 걸터앉는 마루, 나도 자연의 일부였다. 대단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저 달빛을 함께 받는 어둠 속의 일부일 뿐이었다. 병풍처럼 둘러선 앞산이 의젓하게 앉아서 나를 마주한다. 말없는 것이 의젓함이라고 오랜 침묵 끝에 말한다. 뿌리에서 나온 웅숭깊은 소리다. 내가 소란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새벽 산이 일러준다. 그래, 어설픈 말을 내려놓자. 침묵으로 들자. 그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마땅한 걸음이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펴보는 손 안에 빛과 온기가 담겼다. 은은한 달빛과 잠시 머물다 간 반딧불이 전해준 선물이다. 맞다, 모든 순간은, 모든 존재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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