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7)
하나님도 별 도리가 없으시다
나는 확신합니다. 만일 나의 영혼이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 안에서도 드넓은 공간을 찾아내기만 하신다면,
나의 영혼을 이 강물로 가득 채우시리라는 것을.
글을 쓰다가 뒤뜰로 나가 밝은 달 아래 서니,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시 한 수가 문득 떠오른다.
“저 강상(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고자 해도 금할 이 없고 쓰자 해도 다 할 날 없으니
이것이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다.”
이 무진장한 바람과 달빛도 사람이 그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면 스며들 길이 없다. 맑은 바람을 마시면서도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헐떡거리고, 고즈넉한 달빛 아래 앉아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헐뜯고 험담이나 하고 있다면, 그 무진장한 조물주의 은덕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태백도 “청풍명월은 한 푼이라도 돈을 들여 사는 것이 아니다”(淸風明月不用一錢買)라고 노래했다. 그 마음이 물(物)의 집착을 벗어나 한가롭기만 하면 청풍명월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청풍명월은커녕 하루에 하늘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지날 때가 많다. 이런 딱한 우리를 바라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이 철부지 인간들아, 맨날 돈, 돈, 돈 하지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돈을 들여 사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가져도 아무도 금할 이 없으니, 공짜 바람 공짜 달구경 더러 하며 살도록 하여라. 맑은 바람 밝은 달이 일 년에 몇 날 되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는가. 그러고도 뭐 하나님, 야훼님 어쩌구 내 이름자를 운운하니, 참 딱하기도 하다!”
하여,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내면이 숱한 물질과 형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면, 무진장의 하나님도 별 도리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꽃과 십자가 (0) | 2021.05.16 |
---|---|
세속적 욕망의 무게를 줄이지 않고는 (0) | 2020.11.12 |
영적 치매와 과다한 설교 (0) | 2016.08.29 |
우리가 당신을 낳을 성스러운 태(胎)라니요 (0) | 2016.08.03 |
“하나님, 내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0) | 2016.06.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