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모르고서야

한희철의 얘기마을(3)


삶을 모르고서야




“제가 열 살 때 샘골로 글을 가르치러 댕겼어요. 국문이죠. 그때 칠판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샘골 노인들이 참 지혜로웠어요. 어떻게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쟁반에다 좁쌀을 담아 준비를 해 둔 거예요. 손가락으로 좁쌀 위에 글을 썼다가 흔들면 지워지니 아, 그 얼마나 편하고 좋아요.”


“요샌 큰일이에요, 시골에도 도둑이 많으니. 며칠 전엔 성희 네도 도둑을 맞을 뻔 했대요. 자가용 타고 온 웬 남자들이 서성거려 그 집에 온 손님인 줄로 알았지 도둑인 줄 생각이나 했겠어요.”


“바로 그날 부놋골에서 도둑을 맞았데요. 금반지 다섯 개와 쌀 두가마를 잃어버렸대요.”


“흥호리에선 경운기 앞대가리만 빼갔대요. 값나가는 쪽이 앞쪽이니까 대가리만 빼서 차에 싣고 갔나 봐요.”


“노림에서는 교대로 당번을 선대요. 마을에 차가 들어오면 무조건 차번호를 적어 둔다는 거죠. 도둑을 막으려고 그렇게 한대요.”


“고추씨는 잘 나왔어요?”


“아뇨, 잘 안 나와서 다섯 봉 더 사왔어요.”


“작년에 그 고생을 하고서도 고추를 또 심어요?”


“그래도 고추가 제일 나은 걸요 뭐.”


이런 저런 오가는 이야기들, 속회모임을 마치고 나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목사님은 그런 자리에선 은혜로운 간증이나 성경 이야기만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그렇게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뿐이다. 이야기로 나눌 만큼 은혜를 체험한 것도, 성경을 아는 것도 없는 빈약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 또한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난 삶을 배운다. 삶을 모르고서야 말씀이 뭔 소용 있을까, 때마다 그런 마음으로.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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