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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고구마 속이 익기까지

by 한종호 2020. 9. 14.

신동숙의 글밭(234)


고구마 속이 익기까지



마당에 모처럼 숯불을 피웠다. 검은 숯 한덩이가 알이 굵은 감자만 해서 불을 지피는데도 시간이 배나 걸리지만, 한 번 불이 옮겨 붙기만 하면 오래오래 타오르기에, 불을 지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기도 굽고 햄도 굽느라 모처럼  남동생 손이 바쁘다. 마당 가득 하얗게 피어오르는 숯불 연기가 어스름한 저녁 하늘로 평온한 이야기 물길을 터 서로의 가슴으로 잔잔한 물길을 내어준다. 


남동생은 처음 회사에 들어갈 때부터 스스로 고기를 구웠는데, 아직도 굽고 있다고 한다. 이제와서 안 구으면 승진했다고 그러는가 건방지다고 생각할까봐 집게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는 얘기에, 어려서부터 누나보다 헤아리는 속이 깊은 남동생이다. 때론 호랑이 같은 지점장 자리도 어디까지나 섬기는 자리라 여기는 동생이 미덥다.


배를 채운 아이들은 외숙모를 따라서 우르르 강변으로 밤산책을 나섰다. 불가에 둘러앉은 건, 처남과 매형 그리고 친정엄마와 딸이다. 하얗게 이슬이 내린다던 백로가 지난 9월의 밤공기가 내겐 으슬으슬 추운 한기를 일으킨다. 고기 굽기가 끝나고서야 남동생이 몸을 일으킨 빈 자리에 얼른 가서 앉았다. 이제는 혼자서 타는 숯불의 온기가 화롯가에 앉은 듯 따스하고 정겹기만 하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앉은 방안에 피운 작은 촛불이 좋고, 지금도 어느 깊은 산골 오두막집에선가 저녁밥을 짓느라 그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서 지필 아궁이불이 좋은 것이다. 숯불 위에는 아무거도 없지만, 저도 모르게 응어리진 마음을 녹이기엔 그만이다. 동생이 옥수수 과자를 가지고 오면서 구워 먹으면 더 맛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과자를 아예 어릴적 교실처럼 줄을 세워 구웠다. 과자를 숯불에 구웠더니 정말로 바삭하니 더 맛이 난다. 밤공기가 쌀쌀해져 거실로 이야기 자리를 옮긴 후 남편이 문득 일어나더니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햇고구마를 구해온다. 이미 다들 배가 부르지만 아직도 붉은 숯불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은색 호일로 고구마를 감싸서 숯불에 올려놓는데, 고구마가 내 팔뚝만하다. 언제 다 익을까 싶었는데, 고구마가 익기도 전에 어느덧 친정 식구들이 강 건너 친정 엄마댁으로 잠자러갈 시간이 된 것이다. 언제까지고 타오를 줄 알았던 숯불도 어느새 붉은 숨을 다 토해 내고 회색 재만 남았다. 오븐에 옮겨 굽기엔 시간도 너무 늦었고, 아이들 입에서 고구마가 먹고 싶다는 목소리도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은, 그새 외삼촌이 주문 떡볶이로 배를 채워준 다음이다.



다음날 만 하루가 지나서야 굽다가 만 고구마 생각이 났다. 호일을 벗기니 색이 약간 거뭇한 거 말고는 단단한 고구마다. 오븐에 넣고 30분을 돌려도 젖가락이 들어가질 않는다. 거기서 10분을 더 돌려도 젖가락에 저항이 느껴진다. 그러기를 한 시간이나 넘기고도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호일을 벗겨내기로 했다. 생고구마를 구웠어도 이미 다 굽혔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넘긴 것이다. 고구마를 굵직굵직 썰었더니 속살이 노란빛이 아닌 생기가 죽은 회색빛이다. 어쩌다 노란 부분은 남겨서 아이들 주고 나니 못 먹는 부분만 수북하다. 아깝지만 무화과나무 아래에 파둔 구덩이 흙에 뭍기로 했다. 내년에 무화과 열매라도 많이 맺으라며.


만약에 고구마를 첫불에 끝까지 구웠다면, 고구마 속까지 노랗게 다 읽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서 드는 생각은, 마음에 일어난 한 생각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가슴속까지 익기도 전에 꺼져버린 생각의 불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의 불꽃이 붙을만 하면 끼니 때가 다가오고, 깊어질만 하면 세탁기가 다 돌아가고, 찻잔 속에 차를 건져내어야 하는 조각난 일상의 시간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보편적인 생활 모습이란 것이 어쩌면 영혼을 익히기엔 모자란, 해와 달의 흐름과는 

어쩔 땐 따로 흐르는, 시간은 뚝뚝 잘려나가고 언제까지고 인생의 겉만 맴돌게 하는 하루하루가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닿을 때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들여온 근대 산업화 방식의 학교 구조와 함께 회사 구조와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영혼의 성숙을 위해선 모자란, 익기도 전에 종소리가 울리는, 가슴이 일으킨 한 생각의 흐름을 뚝뚝 끊어놓는 시간의 나열들. 타오르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스스로 꺼버려야 하는 촛불의 시간처럼 말이다.


먼 유년기엔 종일 굶었어도, 밤이 되도록 내게 밥 먹으러 오라며 날 부르는 사람도 없이 산새처럼 자유롭던 그 시절이 문득 가슴에 해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온 마을과 뒷산으로 쏘다니던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물질의 풍요 속에선 누릴 수 없는, 가난이 선물처럼 주는 영혼이 맑아지는 시간. 지혜로운 숲의 인디언들이 자녀에게 선물처럼 주는 혼자만의 숲 속 시간. 인터넷의 거장 스티븐 잡스와 빌게이츠가 그들의 자녀에게 한 달에 한번 문명을 벗어나, 핸드폰과 인터넷과 문명의 기기 없이 손수 불 피워 밥을 지어 먹게 한다는 자연 속의 원시적 시간. 토머스 머튼이 그리워한 은수자의 오두막에서 보낸 호젓한 시간.


아직 가본적 없지만, 때론 소로와 법정 스님의 오두막이 있던 울창한 산과 숲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자연만이 가득한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플 때가 있다. 생각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올라 낮과 밤을 잊은 채 앉아서, 육신의 배고픔마저 잊고서 오래오래 타올라, 세상을 향한 저항으로 응어리진 가슴속이 익을 때까지. 그래서 육신이 영혼 만큼 가벼운 빛으로 이 땅이 비로소 하느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에덴 동산이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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