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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한 줌 진실

by 한종호 2020. 11. 18.

한희철 얘기마을(147)


한 줌 진실


<제가 새댁 때 일이었어요. 어느 날인가 기름을 짜러 개치로 나갔지요. 동네에도 기름 짜는 방앗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개치에서 짜면 한 종지가 더 나온다기에 그 한 종지 바라고 어린 아들과 함께 개치로 간 거예요.


기름을 짜 가지고 돌아오는데 뉘엿뉘엿 해가 졌어요. 그때만 해도 차가 드물었구, 천생 개치까진 걸어갔다 걸어오는 길밖엔 없었어요. 이십 리길이었지요.


해가 지자마자 이내 어둠이 이부자리 깔 듯 깔려드는 거예요. 무섭기도 하고, 빨리 집에 가 차려야 할 저녁상도 있어 서둘러 걸었어요. 그치만 한 손으로 아들 손잡고 한 손으로 머리에 인 기름 담은 질방구리를 붙잡았으니 걸음이 빠를 수가 있었겠어요.


그때 마침 뒤편에서 환한 불빛이 비춰 바라보니 자동차가 오고 있는 거였어요. 그걸 본 아들이 “엄마, 차 태워달라고 해서 타구 가자.” 졸랐어요. 먼 길 걷느라 힘이 들었던 거지요.


아들을 봐선 그러구 싶었지만 기름을 질방구리에 담았거든요. 포장도 안 된 길인데 그걸 갖고 차를 타면 기름이 쏟아질 게 뻔했지요.


그런 얘길 아들에게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달려온 자동차가 “빵!” 하고 경적을 울리며 우리 곁을 휙 지나간 거예요. 갑작스런 경적 소리에 기겁을 하고 놀랬는데, 아 그만 그 때문에 이고 있던 질방구리를 놓치고 말았어요. 질방구리가 땅에 떨어져 와장창 깨진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순간 앞이 캄캄해지데요. 다리에서 기운이 쏙 빠지는 걸 겨우 참고 주섬주섬 깨진 질방구리 조각들을 주워 모아 집으로 왔어요. 집에 와 깨진 질방구리에 묻어있는 기름을 모두 따라 담아보니 그게 꼭 한 종지더라구요.


그걸 본 남편이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까지 나가더니 겨우 한 종지 건졌구랴.” 하며 껄껄 웃는 거예요. 그런 남편의 웃음이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어쩔 줄 몰랐지요.>



장에 다녀오는 길, 단강으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듣게 된 이웃마을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이필로 속장님이 전했습니다.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부론)까지 갔다가 결국은 한 종지만 얻게 됐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옆자리에서 이야길 듣던 중년신사가 “아, 그것 참 재미난 얘기네요. 아주머니, 그 얘기 차근차근 다시 한 번 해 보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얘길 글로 쓰면 좋은 글감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웃음이 다시 터졌던 건 속장님이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또 있드라구요, 글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헛간에 걸어놓은 못쓰게 된 살림 도구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싶은 당신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 이야기를 시시콜콜 글로 남기는 목사. 누군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싶어서.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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