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몸의 느낌을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멈춘 그 순간에 분노 속의 기도란,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마치 핵분열을 일으키는 발열체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폭발할 듯한 열이 제 몸의 세포를 녹이고, 파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른 기도를 멈추었던 자각의 순간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후로 저에게 분노란 씨앗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지만 가끔은 무기력한 스스로를 끓어올릴 화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장작불 에너지원이 되기도 합니다. 평소 게을러서 하지 못하던 일을 그 화력을 사용해서 움직이게 할 뿐, 그 화력이 나와 타인에게로 무심코 흐르게 방치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려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싸움과 갈등은 늘상 흐르는 강물의 한 줄기가 되어 우리의 일상 가운데 유유히 섞이어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게로 오는 방해물 또는 장애물을 애써 지우려거나 막으려 들지 않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입니다. 저항하지 않으려는 일입니다. 강물의 넉넉한 흐름 속에 섞이어 흐르도록, 단지 깨어서 바라보는 시선의 고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만든 둑을 세우고 저항하던 힘이 한계 수위를 넘어서고는, 욱하며 터져서 약한 보다 약한 어린 자녀에게로 흘러 가는 경험을 많이도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끝이 없습니다. 단지 방해물과 장애물이란 끊이지 않는 호흡처럼 평생토록, 흐르는 강물 속에 섞이어 흐르는 하나의 물줄기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선택을 하는 일은 저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영역입니다. 불교에선 이번 생을 살아가는 동안 풀어야 할 업장이 될 테고, 기독교에선 제 몫의 십자가가 될 테지요.
감사하게도 저에겐 가슴에 품은 맑은 샘이 있습니다. 예수. 그곳으로부터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나와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눈물로, 기쁨으로, 감사와 감격의 모습으로 샘솟아 나를 적시우고, 흘러 넘쳐서 물길을 내어 세상 밖으로 흐르도록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흐름이 작은 생명을 살리우는 물길이 되기를 소망하는 일. 유약한 저 자신이 스스로 저항하며, 버티려는 제 힘만으로는 이 한 몸이 숨을 쉬기도 버겁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항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더불어 함께 흐르게 하는 편이 한결 마음을 더 넉넉하게 하고, 나와 우리와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살리우는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마음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탁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샘솟는 샘물을 가슴에 품지 못함일 테지요. 가슴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넘쳐서 흐를 수 있다면, 한 줄기의 장애물과 한 줄기의 혼탁함도 넉넉히 품어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를 수 있을 테지요. 제 가슴에 품은 샘물은, 사랑과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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