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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할머니들의 방

by 한종호 2020. 11. 29.

신동숙의 글밭(286)


할머니들의 방



어제 밭에서 뽑은 노란 알배추 속 서너 장, 늦가을엔 귀한 상추 두 장, 푸릇한 아삭 오이 고추 한 개, 빨간 대추 방울 토마토 두 알, 주황 귤 한 알이 침대 사이를 오고가는 할머니들의 방은 콩 한 쪽도 서로 나누어 먹는 방입니다. 


아침이면 작은 보온 국통에 오늘은 무슨 따끈한 국물을 담아 갈까 하고 궁리를 합니다. 옛날 학창 시절에 부모님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뼈가 잘 붙으려면 사골국이 좋다 하시며 구포장에서 버스를 타고 장을 보아 오시던 아버지 생각도 납니다. 


넘어지시기 전날, 아이들이 국물만 먹고 남긴 순대국을 맛있게 드시던 엄마 모습이 힌트를 줍니다. 냉동실에 마저 한 팩 남은 순대국을 따끈하게 데워서 보온 국통에 담습니다. 평소보다 열 배 저속으로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신 엄마가 침대에 앉아서 순대국을 드십니다. 뭐든 쉬엄쉬엄 천천히 드시고 천천히 다니시고 천천히 하시라는 딸의 잔소리가 당분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국물은, 불국사의 애기 단풍이 붉던 날, 맑은 벗님과 맛있게 먹었던 맑은 아구탕이 생각납니다. 남해 작은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엄마는 탕국과 비빔밥도 하얗게 드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한 사발 덜어 놓고, 식구들이 저녁과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잔가시도 다 발라낸 후 따끈하게 데운 아구탕으로 보온 국통을 채웁니다. 곁들여 엄마의 입맛을 돋구는 음식은,  팔만 뻗으면 닿는 옆 침대 밀양 할머니가 건네주신 알배추를 전어 젖갈 쌈장에 찍어 먹는 맛입니다. 


엄마네 냉장고와 우리집 냉장고에도 한 봉지씩 있는 늦가을 배추가 지나가는 동네 마트 앞에 널려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니, 김장철입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도 김치를 담궈야 하는데 하십니다. 김치라면 물김치, 묵은지, 총각 김치, 돌아서면 담궈 둔 김치들이 이미 냉장고마다 가득합니다. 


저녁 나절 돌아오는 집 앞에서 짧은 인사를 드렸더니, 대문 앞 공터에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시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손수 농사 지으신 배추 한 통을 돌담으로 무겁게 넘겨 주시며 맛이라도 보라고 하십니다. 




    ( 그림 : < 할머니 혼자 사는 집>, 황간역의 강병규 화가 )


하늘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강변 가로수의 나뭇잎들도 다 떨어진 초겨울이지만, 땅에는 여기저기 푸릇한 배추가 풍성합니다. 이 많은 배추들로 무슨 음식을 할까 싶어 궁리를 하였습니다.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들은 적이 있는 딸아이가 좋아하는 샤브 국물처럼 야채가 많은 밀푀유나베가 집에 있는 재료에 두어 가지만 더 준비하면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그릇 덜어 두고 저녁밥으로 차려주니 아이들이 기뻐합니다. 딸아이는 "어, 사 먹는 그 맛이랑 똑같아."며 좋아합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부터 아들이 어제랑 똑같이 또 해달라는 말에 이른 아침부터 남편은 깻잎과 소고기 심부름을 다녀옵니다. 


가을 배추와 깻잎과 버섯과 고기가 겹겹이 푹 익은 구수한 국물을 시원하게 드시는 엄마가 고맙습니다. 말끔히 다 비운 보온통은 점심으로 나온 미역국으로 채웁니다. 엄마는 마당에 있는 복순이를 주려고 챙겨 두신 찬밥이 저기 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십니다. 옆에서 들으시고는 맞은 편 할머니의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냉동실에 넣어둔 찬밥 덩이를 꺼내 챙겨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밥을 좋아하는 우리 복순이와 탄이가 한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 밥덩이가 많이 모였습니다. 수술 후 금식을 하느라 드시지 못한 밥, 가족들이 싸온 음식을 먼저 잡수시느라 드시지 못한 밥, 끼니 때면 꼬박꼬박 나오는 밥이 많아서 덜어둔 밥덩이들이 겨울 눈처럼 쌓여 가는 할머니들 방의 냉동실, 이제는 점점 겨울로 접어 드는지 불어오는 강바람이 제법 쌀쌀한 초겨울 아침입니다.


엄마의 등뼈 하나가 금이 가듯 곱게 부러져 그 자리에 그 모양 그대로 있어서 따로 손을 쓰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많이 누워 계시면서도 끼니 때면 침대에 앉아서 식사를 드신 후 한 시간 정도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아주 천천히 걸으시면서 소화를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병실 복도끝 창문으로 들어오는 정오의 햇살이 반갑습니다.


엄마는 등이 가렵다며 봐 달라 하십니다. 햇살이 가득한 창으로 등을 대고 돌아서서 옷을 돌돌 말아 올려서 등을 내 드리니, 엄마는 그 옛날 푸른 멍이 든 아빠의 등 이야기를 또 꺼내십니다. 로션을 가져와서 발라 드리니 참 좋아하십니다. 뼈를 생성하는 비타민 D는 이 지구상에 음식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햇살 밖엔 없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해드리니 창문 앞에서 꼼짝도 안하시며, "아! 참 좋다. 뼈가 다 붙겠다." 하십니다.


방에 계신 할머니들 생각이 납니다.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를 내려오다가 그만 옆으로 넘어져 넙적 다리뼈가 부러져 수술 후 누워 계신 밀양 할머니, 발목뼈 수술 후 조금씩 스스로 걸으시는 할머니, 담석증 수술로 금식 후 그토록 원하시던 삼계탕을 맛있게 드시곤 배탈이 나서 오늘은 흰죽을 드셔야 하는 할머니, 혼자 있어야 하는 집에는 가기 싫고 여기에 계속 있으면 좋겠다 하시며, 가끔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시는 할머니, 아침해가 넘어간 방에 계신 할머니들이 생각납니다. 


이 겨울날 창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햇살의 은총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란 알배추 속 한 장도 서로 나누어 먹으려는 할머니들의 마음이 이 공평한 햇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따스한 마음이 이 겨울날 저녁 어둑해진 우리집 마당에 있는 복순이와 탄이에게도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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