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5. 5. 06:17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저자와 나는 공유한 역사의 시간대가 넓게 겹친다. 비록 같은 하늘 밑에 살았어도, 그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았고, 나는 현장과는 철저히 격리된 상아탑 속에서 스스로 갇혀 살았다. 학문적으로도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 관심과 수용, 우리의 민중신학에 대한 성서학 쪽에서의 지원을 자처했으나, 나 자신의 공헌은 미흡했다. 


70년대 말, 어느 날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피폐해진 모습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때 모 대학 기독학생회에서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건강을 잃었다. 그때 거기에서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한 국립대학교와 두 사립대학교의 기독학생회에서, 정기적으로 때로는 부정기적으로 인도하던 성경공부를 나 스스로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학생들의 요청을 진작 거절하지 못한 것, 위험한 책 성경을, 아무런 예비지식 제공 없이, 예방 조처도 없이, 민감한 비전공 수재들에게 그대로 읽힌 것이 후회막급이다. 실천을 강조하다가, 결과적으로 내가 참여하지 못한 고난의 현장에 내 아우, 내 자식을 대신 보낸 격이 되었으니, 내 죄가 크다. 


은퇴하고 나서도 한 참 후, 은퇴한 사람이 마치 현역처럼 바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를 나무라는 한 친구가 있었다. 이젠 인생 좀 조용히 살라고, 지난 삶을 뒤돌아보며, 자기 성찰을 하며, 참회하는 삶을 살라고, 내게 권한 책들이 있다. 2016-17년에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조지 기싱, 시어도어 젤딘의 책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자서전 같기도 하고, 수상록 같기도 하고, 명상록 같기도 한,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한 해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인생 끝자락만이라도 후회하지 않고 살 것을 다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문의 탓일는지 몰라도, 이 세 명, 영국과 미국 지성인 말고, 우리나라에서도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이들 중에 이런 종류의 명상록이나 수상록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이번에 꽃자리출판사에서 나온 최창남의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를 만났다. 

 


삶의 지혜가 번득인다.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다. 저자의 경륜이 있다. 삶에 대한 성찰이 있다. 시와 산문과 SNS 문자 같은 것이 섞여 나오는가 하면, 이야기의 문체도 유려하다.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읽히면 그냥 읽어나갈 것이지, 남의 글 읽으며 분석하고 평가하고 장르를 규정짓는 못된 버릇 평생 못 버리고, 최창남의 “하는 말”을 연구한답시고 자빠져 있다. 나의 첫 마디, “이건 아포리즘이다.” 20여 년 전에 읽은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책이 떠오른다. 내가 알기로는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아포리즘”이란 말을 책 제목과 함께 나열한 첫 책이다. 독서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시가 끝나면 산문이 나온다. 산문은 ‘하다체’와 ‘하게체’와 ‘합니다체’로 구분된다. 왜 그랬을까? 내가 나를 재촉한다.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계속 읽어, 어서 읽으라고! 독백 같은 것은 ‘하다체’로, 누군가 듣는 이가 설정되어 있을 때는 ‘하게체’와 ‘합니다체’다. 시도 마찬가지다.

이 책 1/3쯤 읽어왔을 때 나는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해 버리고 말았다. “명상록이다”, “수상록이다”, “더러는 회고록이다”(109, 113-114, 133쪽 이하). “더러는 참회록이다”(111쪽). 내 멋대로 어쩌구, 저쩌구.... 이 책 절반을 넘기면서부터는 나는 이 책을 그만 “구약성서 <전도서>류의 지혜문학”으로 분류하고 말았다. 울릉도간첩단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울룽도1974>를 쓰기 위해 생존자 손두익 선생을 만나러 가는 저자(133쪽)를 보면서, 나는 구약 <전도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관찰이다.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과, 억압당하는 이의 억울한 처지를 목격한다. 힘없는 이들이 억울하게 억압을 당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에게는 억울함을 위로해주거나, 맺힌 한을 풀어주는 보복자가 없는 현실을 확인하고 한탄한다(전 4:1). 최창남은 한탄만 하고 있지 않고, 참여하여 위로하고, 실천하러 나선다. 그 결과물이 2012년에 출간된 <울릉도1974>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 1979년 YH사건, 19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 탄압인 '원풍모방사건, 1980년대 콘트롤데이터 노동조합 사건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동네 목회 현장, 노동 현장의 위장취업에 이르기까지 지역 운동에 참여한다. 


내가 이 책을 <전도서>류의 지혜문학이라고 한, 두 번째 까닭은 그에게서 발견되는 해학 때문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296쪽 이하), “서툴게 살 수 있어 좋다”(318쪽 이하)를 위시하여, 2014년부터 삶의 터전을 서울 신도림에서 제주도의 어느 중산간으로 옮기고, 미친 듯이 쏘다니며 살던 삶을 그치고, “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그냥저냥 대충대충 드문드문 서툴게 살기로”(372쪽), “그저 ‘알 수 없는 채’로 살기로 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무엇인가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안다고 아는 것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순간 순간 내 삶에, 내가 머무는 공간에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성의를 다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뿐”(373쪽)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코헬렛의 숨겨둔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한창 때는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 게재된 동화 <개똥이 이야기>(2000/2007), <그것이 그것에게>(2005), 50일간의 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2009), <울릉도 1974>(2012), <숲에서 만나다>(2013) 등의 역작을 냈다. 그는 노동가요 "노동의 새벽"을 비롯한 민청련의 주제가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소로우, 기싱, 젤딘에 필적할 사상가를 만난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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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연세대학교와 히브리대학교(Ph. D.)에서 공부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와 대한성 서공회 총무, 세계성서공회연합회 이사를 엮임하였다. 어지간하면 열정 따위는 시드럭부드럭 스러질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과 탐구하는 열정은 아직도 줄어들지 않으신 듯하다. 2003년 <창조문예>에 황금찬, 이성교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성서신학자와 성경번역자로 살아오는 동안 누구보다도 언어에 예민하였기에, 그 여정이 시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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