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별하였다> 읽기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4. 13. 07:09

 

곡의 여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콘서트가 있습니다. 2010년 여름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루체른 패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사라지듯 끝납니다. 작곡자는 피아니시시모, 즉 가장 작은 소리로 음악을 끝내라는 요구에 더해 ‘죽어가듯이’(ersterbend)란 악상기호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말러 교향곡 9번이 작곡자 자신의 죽음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아바도는 연주가 끝났지만 지휘 동작을 풀지 않았고, 객석에서는 박수를 중단한 채 지휘자의 두 팔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객석은 무려 180초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음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과시하듯 앙코르를 외치거나 박수를 치는 관객을 너무 자주 보았던 터라 충격이 컸습니다. 작곡가 말러와 그 날 연주자를 향한 관객의 배려는 연주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 특히 제2장에 실린 네 저자의 글은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9번 교향곡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게 왜, 그리고 어떻게 문제가 될까요?

 

<나는 사별하였다>는 한희철 목사와 신학자 민영진 박사의 감동적인 추천사로 시작합니다. 1장은 네 저자가 살아낸 가슴시린 사별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심장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분량도 6장까지 중 가장 깁니다. 1장 끝에는 저자들에게 보내는 김기석 목사의 사려 깊은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실었습니다. 1장이 총론이라면 2장부터 4장까지는 각론입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읽는 사별자들에게 각각의 상황에 필요한 코멘트를 해줍니다. 4장 끝에는 아빠를 잃은 자녀들의 고백을 담은 소중한 기록과 만날 수 있습니다. 5장은 사별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18명이 나서서 아내나 남편을 막 떠나 보낸 후배 사별자들에게 주는 조언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6장은 갑작스레 사별을 당한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 이를테면 상속 문제의 처리, 사망자 금융자산조회 방법, 아내나 남편이 타던 차나 지급받고 있던 연금 처리, 한부모가정에 대한 국가 지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나 모임 등을 친철하게 안내합니다. 편집 후기에는 김민웅 목사와 한종호 꽃자리 대표가 이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과 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록 내지 꿀팁으로는 번역되거나 국내에서 씌어진 모든 연령을 커버하는 20권의 죽음 관련 서적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종종 만나는 한종호 대표를 통해 편집 과정에서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를 손에 넣기 전에 페이스북에 올라온 리뷰 또한 읽었던 터라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앞과 뒤에 배치된 편집후기와 추천의 글들을 뒤로 물리고 1장으로 직행했습니다.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이 겪은 사별 이야기 읽기는 한없이 늘어졌습니다. 읽기를 중단하고 멍 때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눈시울은 자주 붉어졌고 전율에 가까운 충격과 그것들이 불러낸 실존적 질문들로 머리는 꽉 찼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봉을 못 내리고 3분간 말러 교향곡 9번의 여운에 몸을 맡겼듯 저 역시 마음의 파문이 가라앉기를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명의 저자들은 남편과 아내를 사별한 자기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만 저는 아내를 먼저 보냈을 때와 내 죽음이 저벅저벅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두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1장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아니 1장에 갇히길 자청했습니다.

 

독후감은 써야 하겠는데 앞에 놓인 두 편의 추천사와 저자들에게 보낸 중간의 편지, 그리고 책 뒤에 붙은 두 편의 글로부터 자꾸 달아나게 되더군요. 한희철, 민영진, 김기석, 김민웅 목사는 개인적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글과 삶 모두에서 늘 배우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양한 죽음과 사별자들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성직자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네 분의 목사와 신학자의 글을 실은 건 바로 그 때문이라 추론합니다. 그렇다면 2장에서 4장까지도 저자들이 아니라 의학이나 정신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로 하여금 정보의 객관적 신뢰성을 높이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목회 전문가와 의학 전문가들이 네 분의 저자 이야기를 앞과 뒤에서 보증해 주고 격려하는 방식도 잠시 그려보았습니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보는 다른 책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권쯤은 이 책의 네 저자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죽음과 사별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통상 앙코르는 연주자가 평소 즐기는 곡이나 짧은 시간에 연주자의 기량을 마음 껏 뽐낼 수 있는 곡 중에서 선택합니다. 코믹하고 신나는 음악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앙코르 전통도 나라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달리 앙코르에 야박하지 않습니다. 아니 요즘은 많은 클래식 연주회에서 앙코르 곡을 아예 사전 공지합니다. 그런 전통이 나라밖에도 많이 알려졌는지 외국 연주자들도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에 오면 앙코르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클래식 공연장에서 브람스나 말러의 중후하고 심오한 교향곡 연주 후에는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전통이 있습니다. 곡의 여운이나 감동을 해치거나 또다른 정서와 뒤섞지 않으려는 배려이자 안전 장치인 셈입니다. 관객들 또한 무겁고 심오한 음악을 듣고 쉽고 발랄한 앙코르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말러 9번이나 브람스 4번 교향곡을 들은 날은 그 음악의 여운을 갖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분들은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성찰적이고 충격적인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네 저자의 글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네 분 목사와 신학자의 글이 내용과 문장 모두에서 최고란 사실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저자들에게 이들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지도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사별하였다>는 4악장의 빼어난 교향곡만 듣고 책을 덮음으로 각자가 그 여운 속에 오래 머물렀다면 좋았겠다는 하나마나한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꽃자리 출판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조금은 압니다. 단 한 권이라도 판매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이런 맥빠지게 만드는 글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네 분 목사는 물론 꽃자리 출판사에도 미안한 맘이 큽니다. 그렇지만 혹시 저와 비슷한 독자들도 있을 거 같아 용기를 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에선 이 책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1장의 네 편 글의 어떤 부분에서 감동하거나 배움을 얻었는지를 중심해서 써보겠습니다.

 

 

 

택배로 이 책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활자화되는 서평도 아닌데 며칠째 못 끝내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네 분 저자들이 맞딱뜨렸던 비통한 상황과 겪었던 슬픔이 방향을 바꿔 제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인지라 찔끔찔끔 글을 올렸습니다. 의사, 간호사, 장의사처럼 매일 죽음과 대면하는 직업인이라면 모를까, 비사별자라면 누구든 네 분 저자들에게만 감정이입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으며 거듭해 물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다면 사별 온라인 카페에 글을 쓰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갈 거냐?'고. 대답은 'NO!'였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40대 초반에 아내를 잃었더라도 온라인 사별 카페를 거부할 자신 있느냐?'고. 대답은 여전했습니다. 누구든 앞날은 장담치 못하니 사별 카페에 가입할 수 있다는 여지는 남겨 둡니다. 만약 가입한다면 해가 몇 번 바뀔 때까지 활동을 계속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권오균 님처럼 마음 한 켠에선 온라인 사별 카페가 없어서 안 될 존재라고 느끼면서 또 한 편으론 이런 저런 이유로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겉돌고 있지 않을까. 내가 사별자가 아님은 사소해 보이는 온라인 사별 카페 가입 여부에서 분명해졌습니다.

 

먼저 떠난 보낸 남편이나 아내를 많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사별자들이 표현했다는 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사별자와 자녀들이야 당연 그래야 하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까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희생자나 겨레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지 우린 충분하게 학습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의 문제가 사적인 사별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점을 비사별자인 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더군요. 역시 저는 비사별자가 맞습니다.

 

많은 사별자들이 기록에 욕구를 갖고 있다는 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피터슨 선교사를 통해 아팠던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 치유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별자들에게 기록이 단순한 기억을 넘어 앞으로 살아가야할 방향성을 찾게 했다는 고백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사별 초에 온라인 사별자 카페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일기처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나의 마음을 기록했었는데, 글을 써 가면서 차츰 내가 가야 할 방향성을 찾기 시작했다."(200)

 

이 책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든 건 함부로 하는 사별자 앞에서의 말입니다. "위로랍시고 건네는 어떤 말도 듣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189)거나 "하나님이 너를 어찌 쓰시려고 자꾸 너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말이 "삼켜지지 않는 음식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49)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완성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 건 비사별자였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아내를 두고 그가 죽었을 때를 상정하며 구체적인 내용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힘들었고, 네 저자들의 글로 촉발된 내 죽음과 관련된 생각들을 글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곤혹스러웠습니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겠으나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하여 정리 좀 하며 살자는 다짐입니다. 뒷 처리를 깔끔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뒷 처리가 필요 없는 삶을 살아야 함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이것뿐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 되겠습니다.

 

-이정숙

이정숙의 글을 읽으며 인용을 하거나 아름다운 문장이라 생각해서 친 밑줄 옆에 단 번호가 28번까지 이어졌습니다. 번호 없이 밑줄만 그은 문장도 여럿입니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쓸 문장이 아니더군요. 사유의 깊이에 놀랐습니다. 심리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 외로움을 정의하기 어렵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외로움은 '내가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무언가를 공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가깝다."(69)

 

이제부터 인용하는 문장은 이정숙의 아포리즘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 남편이 떠났고 나는 길에 떨어진 낙엽 하나 마음에 담지 못했다."(44)

"고통은 나의 믿음을 절망과 의심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신은 내게 변명하지 않았고, 내 분노 앞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를 비웃고 의심하는 나로 인해 초라해졌고 모욕당했으며 상처받았다."(51)

"그의 삶이 여기까지로 족했다면 그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족하다."(78)

"사별 후 나는 제일 위험한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이성적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적으로 되어 가는 사람, 나를 수렁에 빠뜨릴 수도 있고 내게 가장 크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사별 후의 나를 관찰하며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벌이는 전쟁인지도 모른다."(67)

 

이쯤해서 이정숙 문장 옆에 끄적거린 메모 하나 소개합니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든 문장은 정성을 들여 고치고 또 고친 게 아니다. 있는 감정 그대로를 쉽고 편안하게 쓴 문장이 날 울렸다."

 

그의 문장은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울린 이정숙의 문장은 평범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나를 웃기던 그의 못짓과 언어들이 그립다. 내 기억 깊은 언저리에 새겨진 나를 웃기던 그의 우스운 몸짓들이 이젠 나를 울린다."(59)

 

이 문장에 멈춰 왜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 한계를 벗어납니다. 가슴이 먹먹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여기에 적을 수 있을 뿐입니다.

 

 

네 저자들이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다룰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관심사였습니다. 누구보다 처절하게 슬픔과 절망에 직면했던 사별자들이 인간의 모순과 비합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내는 저자들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주제가 이성 교제나 재혼 이야기일 듯합니다. 임규홍은 "외로움을 달래려고 이성을 만나고, 홀로임이 두려워 이성을 만나”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사별자들은 "떠난 자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길 원할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떠난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끌어안고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믿는 듯합니다(167-8). 시댁과 처가의 새로운 관계를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로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어려운 이야기도 빼놓지 않습니다. 떠나 보낸 이가 평생 모은 재산 처리는 사별자 위주로 해결할 것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사별자는 이제 이전의 며느리나 사위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별은 하늘이 인연의 끈을 스스로 풀어 준 것이다. 결코, 사별자의 잘못도 아니고 흠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니다. 그래서 남은 삶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형태로 거듭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이 그렇게 정해 준 것이다."(165)

 

상처한 여성을 과부라 부르는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여 스스로를 과부로 부르면서 그 호칭이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게 선방을 날린 이정숙의 시도는 통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더 빛나는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그는 옳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때로는 틀렸고, 확신하는 삶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성실했지만 때로는 절망했고, 그는 신실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는 배려심이 좋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77)

 

권오균은 불치병에 걸린 신자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치유 집회를 비판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죽고 난 후 불교 공부에 심취했음을 밝힐 뿐 아니라 처음 참석했던 사별자 오프라인 모임이 먹고 마시며 노는 데 실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별자란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기 위해 그걸 용인한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김민경은 사별 초기에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옷, 신발, 주방 도구, 각종 침구류, 액세서리, 화장품 등의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풀어보지도 못한 택배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 집안에 쌓이기 시작했다는, 주부로 하기 힘든 이야길 털어놓았습니다. 네 저자들의 이야기에 많은 독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하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가 저들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연애 기간을 포함해 평생 단 한 차례도 말 다툼을 하지 않았던 부부였으나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 보낸 권오균은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사별한) 다른 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게 떠오른 생각은 인간은 참 사소한 일에도 괴로워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사별한 나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나 배우자가 다정하지 않은 것 정도는 괴로워할만 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매우 작은 일로 보이는 그 문제가 그들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너무 뚜렷하게 보였다."(106)

 

이제 독후감을 끝내려고 합니다. 네 사람의 사별 이야긴 각자가 당했던 사별의 이유 만큼 반응의 표정과 회복 방법도 달랐습니다. 이정숙이 내면으로 파고 들면서 사유의 폭을 넓히며 의미를 추구했다면 김민경과 임규홍은 몸을 움직여 현실과 씨름하는 일에 더 매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정숙을 읽을 땐 문장에 빠져들었고, 김민경을 읽을 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지런하게 잘 정돈된, 너무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에 놀랐습니다. 단순성이 최고의 디자인이라는 걸 생각나게 만든, 또는 절제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생각나게 만든 글이었습니다. 네 분이 보여 준 표정과 시도했던 노력들은 앞으로 사별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도전이자 먼저 걸어간 위로와 새로운 희망의 발자취가 되리라 믿습니다.

 

지강유철/작가, 전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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