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시 84:5-7)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5월 말인데도 며칠 선득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사무실에 장시간 앉아 있다가 몸이 차가워졌다 느끼면 화단에 나가 볕바라기를 합니다. 꽃들의 향연에 슬며시 끼어들어 벌들처럼 코를 벌름거리기도 합니다. 꽃은 싫은 내색조차 없이 자기 향기를 나눠줍니다. 나눠주고 나면 텅 비어 버릴까 걱정스럽지만, 향기 창고가 비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날아와 이 꽃 저 꽃 문을 두드리는 흰 나비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오순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교회력으로 가장 긴 절기로 대림절까지 이어집니다. 오순절은 교회의 생일입니다. 성령은 만나기 어려웠던 이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게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던 이들이 만나 우정을 나누게 만듭니다.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강림절 아침,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낯선 경험을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진 사도들이 골방 문을 열고 대중들 앞에 섰습니다. 놀랍게도 군중들은 사도들의 말을 자기들의 모어(母語)처럼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흔히 이것을 방언이라 말하지만, 사도들이 이상한 언어로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귀가 열린 것입니다. 마음이 통하면 언어는 크게 장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러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도무지 소통할 줄 모릅니다. 생각과 지향, 정치적 입장, 신앙의 빛깔이 나와 다르다고 지레 판단해버린 이들이 하는 말은 우리에게 소음처럼 들립니다. 자기 확신에 찬 이들의 언어는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차이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이들일수록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재단합니다. 그 생각에 포섭되지 않는 이들은 배척하거나 혐오합니다. 마치 기관총을 발사하듯이 거친 말, 단정적인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닿는 곳에서 건강한 생명은 불구로 변하고, 단절의 벽은 점점 높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위를 내포합니다. 다바르는 창조력입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다바르입니다. 아름다운 창조의 흐름이 불의와 부패와 폭력에 막혀 차단될 때 터져나오는 말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희망의 싹을 틔울 수도 있고, 절망으로 이끄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기를 지나면서 우리가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도무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 사랑의 친교를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나와 성향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도 마음을 열고 접촉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많은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몰려서든, 아니면 의지적 결단이든 다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장벽의 저편에 있는 이들이 우리와는 상종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지난 월요일 저는 아내와 함께 청계천변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먼 거리를 빠르게 걸을 수 없는 아내의 사정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걸음을 늦추니 보이는 게 많았습니다. 머리 위로는 장미꽃이 드레드레 매달려 추파를 던졌고, 개천에는 팔뚝 크기의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물가 바위에는 한 다리로 절묘하게 균형을 잡은 채 쉬고 있는 왜가리도 보였고, 뒷목에 길게 돌출된 흰색 깃털이 난 해오라기도 물속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나왔는지 귀여운 아이들도 그 신기한 새들을 보며 으밀아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걷다가 마주치는 이들 중에는 서름한 내색없이 풍경에 대한 감상을 툭 던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정겨운 풍경입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지만 그래도 도심지에 이만한 산책로가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한참 걷다보니 건너편으로 ‘광장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였습니다. 이실직고 하자면 저는 서울에 50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광장시장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절로 발걸음이 그쪽으로 옮겨졌습니다. 포목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한복집 또한 많았습니다. 요즘 한복을 입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저 가게가 어떻게 운영될까 싶어 안쓰럽기조차 했습니다. 손님을 호객하는 이도 있었고, 무심한 눈길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고, 성경을 읽고 있는 이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수십 년째 똑같은 모습과 표정으로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겁니다. 권태로울 수도 있는 일상을 그분들은 어떻게 견디셨을까요?
조금 더 걷다보니 먹자골목처럼 보이는 곳이 나왔습니다. 녹두빈대떡, 마약 김밥, 육회비빔밥, 떡볶이, 해산물 등속이 사열하듯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연신 ‘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문득 제가 읽는 책의 세계가 얼마나 관념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빵을 먹어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은, 자기 잠자리에서 근심에 찬 밤을 눈물로 지새며 앉아 있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대를, 그대 천상의 힘들을 알지 못하리!”(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곽복록 역, 동서문화사, p.136) 하프 켜는 노인의 노래 가운데 나오는 구절입니다.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에 비해 머리를 쓰며 사는 제 삶이 초라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시장을 벗어나 온 길을 되짚어 오는 동안 걷기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모임에 가든 가끔 듣는 단골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여러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 때문에 듣는 질문도 있습니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어떻게 하세요?” 글을 쓰다 보면 어떤 때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이 풀려나오듯, 거미가 거미줄을 뱉어내듯 줄줄 생각이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생각을 타자를 치는 손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고, 대개의 시간은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이끌어내기 위해 긴장하며 견뎌야 합니다. 이런 경험을 세세히 풀어 설명할 수는 없는지라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산책을 해요.” 답해 놓고 생각하니 꽤 적절한 대답이었습니다. 몸의 움직임이 달라지면 생각의 길 또한 달라집니다. 차라리 생각을 비워내고 나면 가출했던 언어가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루트를 통해 생각이 전개되는 셈이지요.
운동 삼아 걷는 것도 좋지만, 영혼의 환기를 위해 느긋하게 걷는 것도 꽤 도움이 됩니다. 해찰하며 걷다보면 바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것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것들이 건네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쫑긋하다 보면 나를 사로잡고 있던 긴장감이 해소됨이 느껴집니다. 자기 초상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못 장쾌한 일이 아니던가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걸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걸어가는 몸은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태곳적에 시작된 생명의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두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짐승, 키 큰 나무들 사이의 순수한 힘, 한 번의 외침에 불과한 것이다.”(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이재형 옮김, 책세상, p.17)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이것 참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오랜 순례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례는 영혼의 중심을 찾아가려는 치열한 몸부림입니다. 순례는 불편함 속으로의 돌입입니다. 어떤 종교 전통에서는 오체투지를 하며 나아가기도 합니다. 자기 몸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지요. 뭘 얻으려는 것일까요? 뭘 얻으려는 것보다는 자기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던가요? 안셀름 그륀은 기독교인의 걷기에 대한 책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을 품고 예수의 동행이 되어 살던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은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던 것일까요? 그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것은 저물녘의 쓸쓸함이었을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걷고 있다. 나는 텅 비었다. 힘이 다 빠졌다. 나는 아는 길을 지나며, 낯선 길을 지난다. 소요 속을 걸으며, 고요 속을 걷는다. 서로 밀쳐 대는 무리와 함께 걸으며, 외로이 홀로 걷는다. 나는 낙망하고 낙담한 채 길을 간다. 혼란스러운 내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길을 간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걸으신다. 그리스도가 나와 나란히 걸으시며 내 길을 열어 주시고, 내 이야기의 의미를 드러내 주시고, 내가 왜 지금껏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밝혀 주신다. 이것은 그분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 김영룡 옮김, 분도출판사, p.89-90)
지금 절망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요? 삶은 신산스럽기 이를 데 없고, 마음 둘 곳도 없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그 길. 그 외로운 길 위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습니다. 가끔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아득함에 갇힐 때,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 천천히 길을 걸어보십시오. 그 길 위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오순절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가슴에 시온의 대로가 열리면 좋겠습니다. 교우들의 가정마다 기쁨과 사랑의 샘이 고갈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5월 2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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