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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세월의 강

by 한종호 2021. 5. 15.



겨울비 내리는 강가는 유난히 추웠다. 그만큼의 추위라면 눈이 맞았을 텐데도 내리는 건 비였다. 내리는 찬비야 우산으로 가렸지만 강물 거슬러 불어대는 칼날 바람은 쉽게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장자리 얼어가는 강물이 잡다한 물결을 일으키며 거꾸로 밀리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았다. 한참을 떨며 강 건너 묶여있는 배를 기다렸지만 뱃사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강 하나 두고 떠난 사연은 무엇일까. 지난해 가을 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은 유치화 청년의 지난 내력을 알기 위해 교회 젊은 집사님과 마을 청년과 치화 씨와 함께 길을 나선 것이다. 이쪽 부론은 강원도, 짧은 폭 강 하날 두고 겨울비 속 풍경화처럼 자리 잡은 저편은 충청북도. 유치화 청년의 먼 친척이 살고 있는 곳이다.

 

 


기구한 사연 속, 열세 살 땐가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었을 때 치화 씨는 먼 친척의 소개로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 농가로 떠나게 되었다.


과수원일, 돼지 치는 일, 되는대로 일하다 보니 어느덧 뼈가 굵어 지난 세월 셈하니 10여년, 강 건너 불어온 바람결엔지 10여 년 동안 끊겼던 아들 소식 전해들은 어머니는, 홀로 질곡의 시간 견디던 어머니는 그 길로 달려가 앞뒤 사정 가릴 것 없이 눈물로 아들 손 잡고 이곳 단강을 돌아온 것이다. 아무도 그 어머닐 막을 수 없었다. 그게 지난 가을이었다.


몇 번은 고되어서, 몇 번은 매 설움에, 어쩌면 조금씩 눈뜨는 자의식에 몇 번을 도망쳤지만 알고 있는 곳은 오직. 강 건너 오늘 찾아가는 그곳, 멀다지만 그래도 피붙이가 살고 있는 곳, 거기뿐이었고 이르면 그날 저녁 아니면 다음날 어김없이 찾아온 주인에 의해 싫은 걸음 다시 이천으로 향한 것이 어느덧 10년, 10년 세월이었던 것이다.


낚시 바늘처럼 꼬부라진, 어쩜 지금 치화 씨의 마음속엔 그렇게 꾸부러진 시선이 불쑥 자라 있는지도 모른다. 10년의 마른 세월이 정 없이 키웠던 건 그런 잘못된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닐 설득하여, 어쩜 10년 안에 만난 아들 또 잃게 되는 건 아닌가 하여 극구 가지 말라 말렸던 어머니를 설득하여 오늘 함께 길을 나선 것이다. 10여 년 전 어떻게, 어떤 조건으로 떠났었는지, 지난 10년간의 보상은 어찌될 수 있는 건지를 우선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전기가 끊긴 오랫동안 빈집이었던 더없이 허름한 집에서 늙으신 어머니와 살아가는 지금 치화 씨의 삶이란 더 없이 막연하다. 미루어 짐작할 뿐인 지난 10년의 시간, 지난일이라고 지금의 막막한 생활을 두고 지난 10년을 그냥 묻어둘 수야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바람에 물결에 뒤뚱거리는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지난 기억 더듬는 치화 씨를 따라 몇 집을 들러 지난 내력 알만한 이들을 만나 얘길 듣고 나눴다.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떠나기 전 치화 씨 얘길 듣고 미루어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다음에 다시 날을 잡아 이천을 찾기로 하고 권하는 점심을 사양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얼마 전 치화 씨 이복형을 통해 오늘 일을 부탁받았다는, 작실마을 새로운 반장이 된 병철 씨는 오늘의 동행에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남의 일인가, 내 일이요 우리 일이지.


돌아오는 길 그새 얼어붙은 길은 넘어질 듯 미끄러웠고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떠날 때 굳었었던 치화 씨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부론에 나와 돌아올 직행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간 음식점에 들렀다. 난롯가에 둘러 앉아 장날 인심만큼 푸짐한 짜장면 곱빼기를 먹으며 추위와 허기를 달랬다.


강 하날 사이에 두고 가깝게 건너다보이는 마을을 차창으로 내다보며 어쩜 오늘 난 얼어붙은 겨울길이 아니라 잊혔던 지나간 시간 위를 걸었지 싶었다. 배를 타고 건너건 좁다란 강이 아니라 그렇게 강처럼 무심히 흘러갔던 아픔의 시간이었지 싶었다.


그 길을 건너 만나게 될 몇 사람, 그들은 누구일지.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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