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편 7절
당신의 크신 사랑만을 믿고 나는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주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하여 엎드립니다.(《공동번역》)
我欲入主室 暢沾主膏澤(아욕입주실 창첨주고택)
爰具敬畏心 朝拜爾聖宅(원구경외심 조배이성택)
나 바라기는 주님집 내실에 들어
풍성한 은택에 넉넉히 젖고
경외의 마음 담아 당신 전에서 예배하는 것이옵니다(《시편사색》, 오경웅)
시인은 주님의 내실(內室)에 들기 원합니다. 당(堂)도 아니고 청(廳)도 아니라 실(室)입니다. 주님과 공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만나고자 함(廳)도 아니고, 손님으로 찾아와 격식을 갖추고자 함(堂)도 아닙니다. 시인은 그저 주님과 내밀한 만남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보여주고 싶은 만남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실(內室)은 사랑하는 장소요, 님의 허락없이는 결코 들 수 없는 장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차지하는 장소요, 둘이 하나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복에 겨워 신음하며 자신을 잊어버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는 님의 신령한 은택에 젖어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 님이 내가 되고 내가 님이 되는 영원같은 찰라를 맛보면 어떤 기분일까요? 동등하다 여길까요? 말도 안되는 시건방진 생각입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사랑에 젖어 자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면 그저 한없는 은총을 입었기에 더욱 더 당신을 우러르고 그리워하지요. 당신이 어떤 분이신데 저를 내실에 들이시고, 제가 뭐라고 저를 받아들이셨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 무한한 간격을 당신의 능력으로 당기셔서 간격없게 하시고 품으신 은총에 감읍하면서도 화들짝 놀라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공경하면서도(敬) 두려워떨지 않을 수(畏) 없습니다. 엎드려 예배하며 그 사랑을 내면에 꼭꼭 눌러 담습니다. 혹여 잊혀질까 그 사랑의 순간을 삶과 영혼에 오롯이 새겨내야지요.
그래야 하는 것은 시인이 주님의 집 내실에만, 성전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치가 전도되고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현실, 인생을 혼돈스럽게 만들고 내면에 다듬어온 사랑을 조롱하며 신기루처럼 만들고자 하는 거짓된 힘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악에서 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그 간절한 기도는 역설적이게도 주님과 나누었던 내밀한 사랑에서 솟아오르는 울림입니다. 악과 싸우기 위해 시인은 독한 마음을 품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날을 날카롭게 벼리지도 않습니다. 악과 싸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되었던 어둠의 전철을 밟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악과 싸우다가 자기의(義)에 빠져서 악만큼이나 자신을 부풀린 괴물로 변한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여전히 많거든요. 그보다는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을 부드럽고 여리게 노래하는 것이, 여전히 사랑에 목마른 것이 그를 그분 앞에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로 여전히 살아가게 하는 것임을 님의 내실에서 배웠기 때문이겠지요.
* 실(室), 당(堂), 청(廳)
청(廳)은 공적인 장소이며 공식적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엄격하고 사적인 관계가 통용될 수 없다. 듣는 이와 호소하는 이의 높낮이가 아주 크다. 듣는 이는 지위만큼의 높은 자리에 서 내려다 보고 고하는 이는 낮은 자리에 엎드려 아뢴다. 당(堂)과 실(室)은 모두 집에 있다. 당(堂)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기에 격식을 갖추고 머무는 곳이다. 주인은 예를 갖춰 맞이하고 손님은 신을 벗고 오른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는 아직 지켜야 할 거리가 있다. 연회를 즐길 수도 있고 사적인 일들을 처리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목적지향적인 곳이다. 실(室)은 안방이다.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주인만의 방이다. 그곳으로 손님을 들인다는 것은 격의없음이며 친밀함이며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임이다. 실(室)에서는 도무지 감출 바가 없다.
또 다른 의미, 공자가 제자 자로의 배움을 평하면서 어느 정도의 학업을 이루긴 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고 평하는 장면이 있다. 학문이나 기능, 사유 또는 관계의 정도를 평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낱말의 간격에서도 자신의 처한 바를 파악하고 나아갈 바를 가늠하였다. 나는 그분과 어디서 뵙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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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징숑(오경웅)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시편사색》) 해설을 덧붙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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