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 16: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6월에 접어들면서 낮 기온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퇴근 무렵에도 낮 동안 달구어진 지열 때문인지 무척 덥습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걷는 데도 땀이 흠뻑 뱁니다. 농부들은 보리 수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내기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땅을 가까이 하고 사시는 분들의 노동이 때로는 거룩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농부들이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사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다른 이들이 누릴 몫까지 전유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박 나세요’라는 덕담 아닌 덕담이 유행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끌해서라도 도심에 집을 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모르진 않지만, 그걸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모두가 인정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불안이 불길한 안개처럼 우리 삶을 뒤덮고 있습니다. 불안은 섬뜩한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슬그머니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 홀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우화 속의 토끼 아시지요? 어느 날 토끼가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한 알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납니다. 전후좌우를 살필 겨를조차 없이 토끼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여 질주합니다. 숲에 있던 다른 동물들도 토끼의 그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왜 달려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기진할 정도로 달린 후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왜 달렸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추곤 했다지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분주함과 서두름 속에서는 지혜가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책장에서 빼드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다가 밑줄이 그어진 부분에 눈길을 주곤 합니다. 오늘도 그 중에 한 권을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만난 구절들이 있습니다.
“시간과 맞서 싸우려고만 하지 않고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자(‘시간은 내 편이다.’라고 믿는 자)는 느림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즐겨야만 한다.”(칼 하인츠 A. 가이슬러, <시간>, 박계수 옮김, 석필, p.172)
“천천히 가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것과 당연한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인내심을 가진 자만이 마음을 열고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앞의 책, p.177)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바쁘고 일이 많으면 우리는 사랑을 잃게 되고 사랑은 노동이 된다. 시간이 있고 시간과의 전쟁을 잊을 때만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앞의 책, p.178-9)
시간의 여백을 마련하고 살자고 하면 사람들은 ‘참 한가한 소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요? 출애굽 공동체는 천천히 걸어도 한 두어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고, 애굽을 떠난 사람 가운데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광야는 출애굽 공동체가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훈련한 수도원이자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철저한 신뢰와 인내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시작한 분을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벌써 30년 저편의 일입니다. 그는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려 지력을 돋우려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기자는 그 무모한 열정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래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망했지요, 뭐.”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작물들도 크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3년째 될 때부터 조금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타산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기자가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망한다면 내 망신인가요? 하나님 망신이지요.” 제가 그렇게 오래 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은 그 고집스러운 농사꾼이야말로 참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하시지는 않을 거다. 설사 망한다 해도 나는 망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살았으니까.’ 이런 강고한 믿음이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고, 지금은 그 뜻을 잇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간 저는 아시아권 선교사들의 새벽기도회 모임에서 zoom을 통해 설교를 했습니다. 200명에 이르는 분들이 동참했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뜨거웠습니다.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은 물론이고 선교사들이 직면한 다양한 어려움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채팅 창에 올라온 기도 제목을 보며 저는 꽤 많은 선교사들이 코로나19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빚진 자 되어 이국 땅, 언어와 기후, 풍토와 문화 등 모든 게 낯선 그 땅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섬기다가 속절없이 쓰러진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절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50분 정도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도 유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팬데믹 상황 이후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편협한 성경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예수님을 15명의 선지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지만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전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는 주제이면서도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지만 성심껏 대답하려고 애썼습니다.
다른 종교가 우세한 지역에서 제도로서의 기독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려 할 때는 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정신으로 사는 이들을 마다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누군가의 은결든 마음을 깊은 공감으로 다독이고, 그들 속에 있는 존엄함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라는 선교 신학자는 선교를 가리켜 ‘매력의 감염’이라 말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바라보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이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소개하려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현장에서 겪는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제가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선의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바로 선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봉사 현장에 가서 겪은 일을 들려준 바 있습니다. 기억이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아버지는 빈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가서 이발 봉사를 하곤 했습니다. 아베가 따라갔던 그날, 공교롭게도 이발기계에 한 사람의 머리카락이 끼었고, 고통을 느낀 그는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린 아베에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베는 아버지에게 뭐하러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봉사할 자격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선의가 선의로 응답받지 못할 때도 여전히 그 일을 지속할 힘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는 꽤 오랫동안 비대면 예배를 지속해왔습니다. 6월 20일부터 현장예배를 재개하려 합니다. 감염자가 획기적으로 줄고 있진 않지만, 많은 분들이 백신 접종을 받으셨고, 교회 안에서의 예방 수칙에 다들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우들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대합니다. 예배당에 고요하지만 마음이 담긴 찬양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 그립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6월 1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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