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신 주님, 제 인생의 배를 저어 아늑한 당신 항구로 이끄소서. 거기라면 죄와 갈등의 풍랑을 피하여 안전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취해야 할 항로를 보여주소서. 제 안의 분별력을 새롭게 하시어, 저로 하여금 가야할 방향을 바로 찾게 하소서. 비록 바다가 거칠고 물결이 높다 하여도, 당신 이름으로 수고와 위험을 뚫고 나가면 마침내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줄 아오니, 저에게 바른 항로를 선택할 힘과 용기를 주소서.”(카에사리아의 바실리우스, 이현주가 옮기고 엮은 <세기의 기도> 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내에 넘치시기를 빕니다.
벌써 6월입니다. 망종(芒種) 절기가 다가옵니다. 왠지 햇보리밥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빨갛게 익은 앵두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이른 아침 공원에서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앵두를 따서 입에 넣는 노인을 보고 빙그레 공모의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오디 열매 또한 지천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오디는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피하지 못해 짓뭉개지면서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제 아내는 장에서 오디를 사옵니다. 한 개 두 개 달착지근하고 신선한 오디를 먹다 보면 어느새 엄지와 검지 끝에 검붉은 물이 듭니다. 오디 물든 손을 보면서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농부로 사셨던 두 분의 손은 겨울만 빼고는 늘 풀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풀물이 든 손이야말로 정직한 손이 아니겠습니까?
생의 과정 중에 만난 것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에게 흔적을 남겨놓습니다. 그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슬그머니 스며들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 흔적이야말로 우리 삶의 빛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과의 만남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엷고 진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와 다양하게 얽힌 사람들은 우리 존재에 어떠한 형태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누군가 자기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흐뭇하게 상기하게 되는 흔적이 되고 싶습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교우들의 소식을 들으며 인생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일곱 가지 감정이 번갈아가며 찾아옵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지경에 선 분도 있고, 불이 사위어가듯 오랜 질병으로 기력이 쇠해가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울과 공허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곧추세우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시간을 겪고 있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 23:4).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단순해 보이는 구절이지만 그것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백이라면 우리는 당당하게 눈물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저도 다음 주 초에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목회실의 다른 식구들도 잔여 백신 접종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백신 접종을 마친 이들의 경험담이 심심찮게 올라옵니다. 아직 꺼림칙한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와 가족들 그리고 동료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접종에 임하시면 좋겠습니다. 부활절 이후 비대면으로 진행되던 예배는 6월 셋째 주인 20일부터 대면예배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이 때 쯤이면 꽤 많은 이들이 백신 접종을 받으실 시간입니다. 물론 좌석수의 20%로 제한되지만 현장 예배를 목말라 하시는 분들이 많아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갑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좌석에 잠시 앉아 교우들을 생각합니다. 오후가 되면 찬양대석에 햇살 한 줌이 내려앉아 잠시 숨을 고르다가 물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 고요한 풍경이 참 좋습니다. 교회 건물이 지어진지 40년이 넘어 이곳저곳 손 볼 곳이 많아집니다. 지붕에서 녹을 벗겨내고 새로 칠을 했습니다. 곳곳에 갈라진 곳으로 물이 스며들고 있기에 방수작업도 진행했습니다. 지붕의 물매가 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위험한 과정인지라 인부들의 안전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공사가 다 마무리 되지 않았는데, 모든 일정을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UN이 해양 오염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환경보호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1972년에 제정한 날입니다. 벌써 거의 5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지구라는 초록별은 중병에 걸렸습니다. 기후학자들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산불과 홍수, 가뭄과 땅 꺼짐, 대규모 빙하의 붕괴 현상은 그들의 경고가 겁주기 위한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의 생태학자 윌리엄 리스(William Rees)와 마티스 웨커네이걸(Mathis Wackernagle)이 개발한 독창적인 지표입니다. 생태 발자국은 인류가 매일 소비하는 자원과 배출되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토지 면적으로 환산한 수치입니다. 동물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많은 흔적이 남지 않지만, 사람이 머문 자리는 황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태발자국이 크기 때문입니다.
국제사회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공동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2050 탄소중립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탄소중립이란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불가피하게 발생한 온실가스는 나무를 심거나 청정에너지 분야에 투자함으로 실질적으로 탄소 배출량을 0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목표가 공허한 구호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와 산업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신앙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무총리실 녹색성장위원회 김정욱 민간위원장은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데 무관심하면 기존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정책을 좌지우지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눈을 똑바로 뜨고 이 세상의 이 나라의 정책이 바로 가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교회가 빛이 돼 가지고 탄소중립 사역이 잘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교회는 단순히 감시자의 역할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만물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해야 합니다. 지으신 세상을 보며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그 마음을 자꾸 떠올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경탄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비사회가 우리에게서 자족하는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욕망을 우리 삶의 밑절미로 삼을 때 삶의 무질서와 혼돈과 버거움은 커지게 마련입니다. 심원한 경험은 사라지고, 더 큰 세계와의 접속은 끊어집니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면서도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며칠 전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 숲속의 생활>이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월든>은 이미 영어책으로도 읽었고 몇 종류의 번역서도 가지고 있지만 굳이 이 책을 또 산 것은 그 번역자인 안정효 선생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도착한 책을 군데군데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 까닭은 인생을 생생하게 의식하며 살아가고, 삶의 본질적인 면목들만 접하여, 인생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내가 충실하게 배워서,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인생을 헛되게 살지는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며, 나날의 삶이 너무나 소중하여, 삶답지 않은 삶이라면 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 소망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숲속의 생활>, 안정효 옮김, 수문출판사, p.137)
소로우는 미국의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에서 몇 년 살았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그 호수를 저도 찾아가 천천히 한 바퀴 걸은 적이 있습니다. 소로는 그곳 숲에 들어가 산 것은 인생을 생생하게 의식하며 살고 싶었고, 인생을 헛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하네요. 이 문장이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웁니다. 우리 삶은 어떤가요? 모두가 숲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습니다. 개그맨들의 우스갯소리를 인용하자면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겠습니까?’ 분주하게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제 이야기가 한가한 소리쯤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주할수록 시간을 마련하여 일상과 무관한 세계에 잠시 머물러야 합니다.
시인 문태준은 “오늘날에도 유형(流刑)이라는 형벌을 시행하는 국가가 있다면/나는 그 나라에 가 죄를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갇히고 싶은 감옥은 철창살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는 풀잎 속에 갇히기를 원합니다. 벌레와 바위 속에 갇혀도 좋겠다고 말합니다(문태준 시집, <먼 곳>, ‘유형’) 시적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저는 요즘 월요일이면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공원을 걸으려 노력합니다. 며칠 전에는 원효로에서 연남동까지 이어지는 경의선숲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홍제천에 이르러 돌아왔습니다. 느긋한 평화를 누렸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힘겨운 나날이지만 스스로 희망과 기쁨의 빛을 만드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으로 주변을 밝히면 더 좋겠구요. 주님의 은총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6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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