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편 3절
야훼, 나의 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공동번역》)
容我一申辯(용아일신변)
주님 저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락하소서〔주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시편사색》, 오경웅)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겪는 이유만 알아도 그 고통이 반감되는 걸 경험합니다. 왜 지금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면 비록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조금은 견딜 힘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피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쉬 꺽이지 않을 결심을 다지기도 하지요. 만약 어려움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것이라면 책임지는 자세를 통해 도리어 자신의 그릇을 더 넓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의 언명이 오래도록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주었겠지요.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며,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한다.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어 뜻과 같지 않게 하나니 이것은 그들의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위해서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是故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그러나 늘 이런 마음과 자세를 품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속상해서 푸념하고 털어놓을 누군가를 찾기도 하지요.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 내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이를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려움이 무고(誣告)로 인한 것이라면 억울한 심정은 참 견디기 어렵습니다. 속된 말로 열불이 나서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마치 이 세상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니 그 어려움에는 분명 알지 못하는 숨겨진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너무도 억울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터뜨리게 되는 울분은 두서조차 없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억울한데 갈 곳마저 없습니다.
찾아갈 곳이 없을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울분을 통하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시편 7편의 전반부의 간구는 마침표 없이 토해내는 시인의 속마음입니다. 정말 제가 저들의 말대로 그랬다고 한다면 능욕을 겪고 흙범벅이 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헝클어진 마음이 맘껏 솟구쳐오릅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의 우리 신앙은 너무 얌전하거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헝클어진 감정의 토로 가운데 시인에게서 중심이동이 일어납니다. 그의 언어는 자기의 결백에서, 원수들의 모함과 그로 인한 분노에서 점차 하느님께로 옮겨갑니다. 자신의 감정과 언어의 무게가 쏟아지는 만큼 어둠의 기운이 스러지고 이 마구잡이 토로를 받아주시는 분이 자신의 삶과 여정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떠올립니다. 마구 쏟아내던 사람이 점차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모아 이 모든 것을 들으시는 분을 향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의 고통)은 작아지고 이 모든 것을 거두시고 당신의 섭리를 펼치시는 하느님에 대한 더 깊은 신뢰에로 이끌립니다. 그러니 그는 어느새 흐트러진 자신은 잊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그분을 찬양하려 합니다. 악에 북받쳤던 감정이 가라앉으며 그 가운데서 미더운 분을 향한 고요하고 정제된 읊조림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네 당신이 옳습니다!”
그렇기에 자주 터무니없는 억울함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서 가장 억울하셨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께만 토로하셨던 예수님을 제대로 우리 마음에 모실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뵐 수 있지요. 바로 거기서 그분이 기다리시지요. 그런 자리에서야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모욕을 받고 버림받으셔서 구원을 이루는 신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한순간을 제대로 누릴 수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 한순간이 우리 인생 전체를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히브리 시인보다 더한 감격과 찬미를 올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우징숑(오경웅)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시편사색》) 해설을 덧붙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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