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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전기밥솥

by 한종호 2021. 10. 6.



드라이버, 펜치 등 연장을 챙겨가지고 이른 아침 작실로 올랐다. 단강리에서 제일 허름하지 싶을 아랫작실 언덕배기 박종구 씨 집엔 아무도 없었다. 벌써 일터로. 학교로 간 것이었다.


30촉 백열전등, 컴컴한 방에 불을 켰다. 두꺼운 이불이 방 아래쪽으로 그냥이고, 윗목엔 철화로가 있다.


불기가 없는 화로 위엔 커다란 까만색 냄비가 있는데, 그 위론 라면 부스러기가 둥둥 떠 있었다. 익지도 않은 채 불은 라면이었다. 올라올 때 만난 학교 가던 봉철이, 아마 그의 아침이었나 보다.


두꺼비집을 찾아 전원을 내리고 천정을 가로지르는 두개의 전선에서 선을 따 테이프로 감싸고 벽 쪽으로 끌어내려 아래쪽에 콘센트를 달았다. 


다시 전원을 올렸다. 콘센트 불이 오는지 확인을 해봐야지 싶어 방안을 살폈다. 부엌, 방, 모두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30촉 전등 외엔 전기를 사용하는 기구가 하나도 없었다. 박 종구 씨를 찾아 만나 저녁에 다시 오겠다 말하곤 내려왔다.

원주에 나가 주보인쇄를 해 가지고 온 저녁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댑터를 챙겨 우비를 입고 다시 작실로 올랐다. 일을 마치고 온 광철 씨, 중학교 3학년 민숙이. 6학년 봉철이가 있었다. 전기밥솥이 와 있었다. 지난 번 사오고도 이제껏 콘센트가 없어 사용치 못하고 친척 네 보관돼 있던 전기밥솥. 매뉴얼을 꺼내놓고 차례차례 사용법을 민숙이에게 가르쳐 줬다.


“민숙아, 가서 쌀 씻어올래. 한번 실제로 해보자” 
민숙이가 나가 쌀을 씻어왔다. 
“자, 한번 해봐. 그렇지 밥통을 꼭 닫고 취사 단추를 눌러.”
취사 단추 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한참 있다 김이 날거야. 그리고는 취사가 보온으로 넘어가지. 보온으로 넘어간 다음 15분 정도 뜸을 들이면 밥이 되는 거야.”
이젠 됐지 싶기도 했고, 내일 주일 준비도 해야지 싶어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이왕이면 밥 다 되는 걸 보고 가자.’


둘러앉아 밥 되기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광철 씨가 지금도 자랑스레 국민교육헌장을 외고 있다는 것도, 민숙이의 꿈이 디자이너라는 것도, 자신은 산업체학교라도 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은데 집에서는 아예 고등학교에 안 보내려 하여 민숙이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썰렁한 윗방, 민숙이 잠자리엔 여름 내내 비닐 돗자리 하나 깔렸다는 것도, 민숙이가 저녁은 아예 안 먹고 잔다는 것도, 민숙이의 아침 기상시간이 다섯 시 반이라는 것도, 심심할 때면 성경을 읽는다는 것도, 동생 봉철이에게 알파벳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도, 봉철이가 책을 잘 읽고 받아쓰기도 잘 한다는 것도 난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어느새 밥이 끓고 뜸이 들어 뚜껑을 여니 맛있는 밥이 지어졌다. 재를 날리며 매캐한 연기에 기침을 해가며 짓던 밥이었는데. 주걱으로 한 주걱 떠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한 주걱씩 나눠 맛을 보았다.


“전기밥솥에 민숙이가 처음 지은 밥이 아주 맛있게 됐다. 오늘처럼만 하면 민숙이는 일류요리사 될 거야. 자 그럼 난 갈게. 내일 교회에서 보자.”


더욱 굵게 내리는 어둠속 찬비. 그러나 가슴속엔 왠지 모를 따뜻함. 좀 더 기다려 박종구 씨 오거들랑 함께 저녁을 같이 먹고 오면 더 좋지 않겠냐는 선한 꾸중 뒤로 그런 따뜻함으로 전해져 왔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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