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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하나님으로 불붙은 사람

by 한종호 2021. 10. 28.



“그는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황홀해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에 아찔하도록 현기를 느끼며, 창조의 오묘함을 보고 말을 잃고, 하늘의 자비를 두고 노랫가락을 읊은, 하나님으로 불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어떤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롤런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p.30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나날입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먼 산도 바라보고, 하늘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땅만 바라보며 살면 시야가 협소해지고 감정이 메말라가기 쉽습니다. 먼 데 눈길을 줄 때 중력처럼 우리를 잡아당기는 잡다한 일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남의 통일이었습니다. 주님의 활동의 비밀은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막 1:35)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개역 한글 성경은 ‘아주 이른 새벽에’라는 구절을 ‘새벽 오히려 미명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새벽’과 ‘미명’ 사이에 틀어박힌 ‘오히려’라는 부사가 낯섭니다. ‘오히려’는 “생각한 바와는 달리 도리어”라는 뜻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낯섦이 묘한 맛을 냅니다.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예외적 행동을 예상하게 됩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그 시간은 뭔가 새로운 것이 도래할 것 같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외딴 곳이 숲이라면 오직 새들의 지저귐이 새벽의 고요함을 깰 것이고, 광야라면 바람 소리만이 귓전을 스칠 것입니다.

아,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갈릴리 호숫가에서 맞이한 새벽 시간이 떠오르는군요. 몇 해 전 교우들과 ‘성서의 땅 답사 여행’ 중 잠시 머물렀던 갈릴리 숙소에서 호수는 불과 몇 십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추야자가 지붕 위로 후둑후둑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룬 분도 계셨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 저는 호숫가로 나가 누군가 내놓은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호수에 배를 띄우고 언덕에 앉은 사람들에게 가만가만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큰 물결이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가시던 주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갈릴리로 돌아와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빈 그물만 건져 올린 제자들의 쓸쓸함도 짙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고요하게 찰랑대며 기슭으로 밀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제자들의 수런거림처럼 들렸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스산할 때면 그 호숫가에서 맛보았던 고요함이 그리워집니다. 아, 그리고 갑자기 물이 흔들리면서 수달처럼 보이는 동물이 나와 내 곁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가던 광경도 떠오르네요. 교우들과 함께 성서의 장소들을 다시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심방 차 간 것이지만 오가는 길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활짝 핀 억새가 바람을 맞아 나붓거리고 있었고, 아직 베지 않은 벼들도 추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고구마를 수확한 농부들이 박스에 고구마를 담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미 말라버린 고춧대에 붉은 고추가 달려 있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병이 들어 수확을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일정이 있어 가을 풍경을 더 눈에 담지 못하고 황급히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분주함은 우리 삶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경제적 빈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서적 빈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아름다움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반이며 형인 시인 고진하 목사가 얼마 전 <야생초 마음>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강연 차 서울에 올라온다 하여 인사동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값도 형이 냈습니다. 얼마 전 박인환 문학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꽤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흔쾌히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가 제게 건네준 책은 참 예뻤습니다. 스물 네 개의 야생초에 얽힌 이야기를 다각도로 들려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더욱 빛난 것은 그의 딸인 화가 고은비가 정성을 다해 그린 들풀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화가는 각각의 식물들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발견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그것을 꼼꼼히 살펴보고 만져보면 저절로 뭘 그려야 할지가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그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자는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자기 존재를 아낌없이 선물로 내어주는” 그 식물들을 일러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텃밭에서 새싹을 틔우는 생명의 기척을 내 몸을 낮춰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 꽃몽우리가 열린 후 씨앗으로 여물기까지의 수고로운 과정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일. 그렇다. 지구별 위에서 공생한다는 것은 그렇게 너와 나를 살피고 응원하는 일. 그런 알뜰살뜰한 살핌과 응원은 결국 너와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원이 아니던가. 이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식물도 오감五感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섭생을 살피고, 무심한 듯한 자비로 지구라는 광대한 몸의 세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그 창조적 자발성을 발휘하지 않던가.”(고진하 글/고은비 그림, <야생초 마음>, 디플롯, p.8-9)

 

 


일을 하다가도 책상 위에 놓인 그 책을 무심코 집어 들어 이곳저곳 들춰보다보면 “대지의 미소인 꽃들처럼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사람들을 꼬드기는 그의 마음이 떠올라 저절로 흐뭇해집니다. 각박한 세상에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날마다 징징대며 살자고 말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좋습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가득 찬 신비와 기적을 보지 못하기에 그들은 빈곤합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의 허기증에 시달립니다. 밑 빠진 독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울 수 없습니다. 바닥짐(ballast)이 없으면 배는 작은 파도에도 일렁입니다. 옆질과 키질을 견디지 못할 때 배는 좌초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바닥짐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벌컥 내고, 작은 차이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기에 실수 연발입니다. 능숙한 뱃사람이 넘노는 파도를 타고 가야 할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파도를 타고 나아갑니다.

이번 주일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성채 교회 문에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의 신학 논제를 게시했습니다. 루터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의 행동이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예측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알았더라면 그런 싸움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는 ‘모름’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베이징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임으로 뉴욕에 폭풍우가 몰아칠 수도 있다지요? 이것은 물론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세상의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겨도 될 것입니다. 95개 반박문의 제1조는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듯 보이는 명제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선다는 것은 욕망에 휘둘리던 옛 삶과 결별한다는 말입니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시스템으로서의 종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과 지향의 변화가 더 근원적입니다. 물론 제도 혹은 형식이 내용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제도를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대가 찢어지기 쉽습니다. 각 교단이 보고한 통계를 보면 신자들의 수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파른 하락세가 심각할 정도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과연 교회의 미래가 있겠느냐고 우려 섞인 음성으로 묻습니다. 신학교는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은 기회의 시간입니다. 비본래적인 것들을 덜어내고 본래적인 가치를 확고하게 붙들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가을이 깊어가면서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집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졸가리만으로 겨울을 견딥니다. 잎이 진 후에야 우리는 나무의 상처와 옹이를 살피게 됩니다. 상처는 나무가 견뎌온 세월의 풍경입니다. 고급 가구를 만들 때 귀하게 쓰이는 먹감나무 무늬는 안으로 스며든 나무의 상처입니다.

지금 교회의 내상이 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나 예수 정신을 저버린 목회자들로 인해 세상이 소란스럽습니다. 교회에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동안도 교회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까지도 받아들여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릇된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동시에, 바른 것을 옹골차게 붙드는 것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쓸데없는 싸움에 힘을 다 빼느니 차라리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창의적 노력을 하는 게 낫습니다.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펴야 할 때입니다. 절망의 말, 비평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멋진 일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넓히고, 하늘빛을 이 눅진눅진한 일상 속에 끌어들이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의 소명이 아닐까요?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계신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용감하게 주님을 신뢰하며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며 사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2021년 10월 2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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