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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꽃씨를 뿌리는 사람들

by 한종호 2022. 6. 16.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오랜만에 편지를 통해 인사 드립니다. 벌써 6월 중순입니다. 해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새벽 5시만 되면 창밖으로 환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이미 보리를 다 베고 모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토마토 순지르기도 거를 수 없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밭에 들어가 토마토 곁순을 잘라주던 일이 떠오르네요. 약쑥을 베어다가 효소를 담그는 분들도 계십니다. 열매를 맺는 남새에 버팀대를 세워주는 것도 이맘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봄 푸성귀로 여름 김장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굳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삶을 누릴 줄 아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신다지요? 때를 분별할 수만 있어도 삶은 제법 풍성해집니다. 안달복달하지 말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전도자의 고백이 참 담백합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전 3:12) 이와 대조적인 구절도 떠오릅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은 버는 것도 헛되다”(전 5:10). 이 구절은 공감은 가면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 삶이 돈에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없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기 보다는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산책을 즐깁니다.

공원 산책을 하다보면 가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 맑고 청량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울울한 가슴에 뭔가 틈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정현종 선생은 ‘올해도 꾀꼬리는 날아왔다’라는 시에서 “네 소리의 경전에 비하면/다른 경전들은 많이 불순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소리의 경전’이라는 말이 낯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사크라멘툼 문디Sacramentum Mundi’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성사’라고 새길 수 있는 라틴어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거행할 때 떡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은총을 떠올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들은 성사의 도구가 됩니다.

찬송가 79장의 시인은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온 세상을 찢을 듯 울리는 뇌성도 주님의 권능을 노래합니다. 볼 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 경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새벽 숲을 걷노라면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어둠을 쪼아 빛을 부르는 다양한 새소리의 향연이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영성가들은 삶이 너무도 분주하기 때문에 기도에 집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정없이 우리를 몰아치는 일에 치여 영혼이 납작해지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시간을 마련해 자연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난 부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대면예배에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2부 예배 때는 앉을 자리 찾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저는 회중석에서 우렁우렁 들려오는 찬양을 큰 감동으로 듣곤 합니다. 그 찬양은 각자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주 안에서 우리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을 바라보며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기리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들도 그 찬양에 동참합니다. 마침내 그 찬양은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우주적인 대합창입니다. 저는 요즘 교회가 예배 공동체라는 사실을 가슴 벅차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CBS의 모금방송에 나가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사들은 대개 그 사회의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 곁에 머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자리에 있는 이들보다는 아픔과 고통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더욱 복음에 개방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애써 일궜던 삶의 터전이 단 한 번의 화산 폭발로 삽시간에 폐허로 변해 망연자실한 필리핀 섬 지역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지역에 세워졌던 교회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화산재가 덮여 예배당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배를 타고 그 폐허로 변한 섬을 다시 찾은 선교사님의 눈에 눈물이 어렸습니다. 선교사님은 예배당 잿더미 속에서 낡은 성경책을 찾아 툭툭 화산재를 털어내며 ‘아!’ 하는 탄식을 쏟아냈습니다. 다행히 한국교회 성도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지역에 다시 교회가 세워졌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모여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김현승 선생님의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감사했던 신앙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받았기에/누렸기에/배불렀기에/감사하지 않는다”.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검질기게 희망을 일구면서 그들은 자기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허물어진 마을에서/불 없는 방에서/빵 없는 아침에도/가난한 과부들은/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우울에 침윤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고통 속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의 마지막 연은 특히 우리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도 같은 진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8-9)

이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4:10). 이 고백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이겠습니까? 죽기로 작정하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믿음이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에 잇대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코비드19로 말미암아 꽤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제2의 고향에서 아픔을 겪는 이들을 돕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하다가 그 땅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보상을 바라고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받은 바 은혜를 되갚기 위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그래도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절로 먹먹해집니다. 그분들이 뿌린 사랑의 씨는 언젠가 때가 되면 발아하여 꽃을 피우리라.

 

 

몇 년 전, 칠레 안데스 산맥 아래 펼쳐진 아타카마 사막이 꽃동산으로 변한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매우 건조한 지역인데, 기상 이변으로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지자 땅 속에서 잠자고 있던 당아욱(mallow flowers)이 일제히 피어났던 것입니다. 죽음의 땅이 꽃 동산으로 변한 장관을 보며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서도 가끔 이런 장관이 펼쳐진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씨는 언젠가 조건이 갖춰지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마련입니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거칠고 사납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 그의 속에 아름다움의 씨를 심고 적절한 때가 되면 그 씨가 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끝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파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심고 물을 줄 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 다 반응하며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 곁에 머물면서 그분들의 ‘설 땅’이 되기로 작정한 분들과 연대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그분들 손에 꽃씨를 쥐어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특히 원로 교우들이 그러합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던 분들이 조금씩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과정이기에 되돌리기는 어렵지만, 안쓰러운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교회에 오시는 어르신들을 교우들이 각별한 사랑과 애정으로 맞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이 혼자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교우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낯선 얼굴과 만나면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치지 말고 한 마디라도 다정한 말을 건네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끌어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오순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숨이 우리 속에서 잦아들지 않기를 빕니다. 주님의 생기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 북돋는 우정이 필요합니다. 어느 시인은 우울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제안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변을 명랑함으로 물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주님의 은총이 새겨지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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