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12. 7. 16:44

 

 

<그리워서, 괜히>는 오래 전 사라져간 유년의 시절을 노년이 되어가는 세월에 다시 손에 어루만져 읽는 이들에게 그리움, 슬픔 그리고 아련함과 자기성찰의 자리로 초대해줍니다.

 

내 기억 속의 유년 시절은 대체로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불행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행복에 더 가까웠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져 사탕을 사 먹지 못하게 된 일들에 대한 기억도 있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이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여는 저자는메뚜기, 잠자리, 방개, 거머리, 문둥이, 미군이 던져주던 사탕, 양색시 누나들, 친구들, 형과 누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셀렘민트껌, 바브민트껌, 텔레비전, 버드나무, 옥수수밭, 얼음공장, 경미극장, 장안벌 등과 루핑으로 지붕이 덮여 있던 교실, 개울에 떠내려오던 사과상자 등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그래서 유년 시절은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나 마주 대하면서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모두 정겨운 기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의 추억은 우리의 풍경이 되고 낯설던 동네가 자신이 살던 동네로 변모하곤 합니다. 물론 세대마다 다른 기억을 지니고 살고 있기에 그 안에 똑같은 자세로 들어설 수는 없을지라도 느끼게 되는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살아있는 파편들이 되어 세포증식을 한다고 할까요.

 

그의 말대로 사람들은 그들의 유년 시절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 삶의 가장 소중하던 시절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습니다. 유년 시절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삶의 조각입니다. 퍼즐 조각입니다. 이 조각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삶이라는 퍼즐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그리워서, 괜히>는 이상하리 만치 괜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방치되어 있던 조각들을 불러내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도록 돕고 있습니다.

 

, 그랬어! 그게 그런 거였어!! 하는 식으로 우리는 자기 이야기처럼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건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시간입니다.“나의 영혼은 전설처럼 남아 있는 수십 년 전의 다락방으로 달려갑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각자 오랫동안 문고리조차 잡지 않았던 자신의 다락방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는 퀴퀴한 세월의 냄새에 젖어듭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다락방으로 오르자 묵은 세월을 뛰어넘어 마치 어제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제는 서 있을 수 없이 자란 나의 몸뚱이 뿐입니다.”라고 독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월은 흘렀으나 다락방에 들어선 우리는 어느새 그 시절의 아이가 되고, 그 시절의 냄새를 맡고 그 시절의 풍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몸은 노인이 되어가도 존재는 여전히 아이라는 이 신기한 도술이 펼쳐지는 곳에서 독자들은 저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자신과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얼마나 어렸는가! 세상의 크기는 또한 얼마나 컸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가! 이미 익숙했던 곳의 지도를 꺼내들고 다시 처음 가보는 길처럼 길을 찾는 건 흥미롭고 긴장되는 즐거움입니다.

 

때로 아려오는 아픔이 있지만 그 조차 추억 속에서는 행복이라고 할까요.

 

짙은 화장을 한 양색시 누나들은 미군부대 옆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우리들의 눈에는 정말 눈부시게 예뻤습니다. 물론, 껌을 얻어먹는 날의 양색시 누나들은 더욱 예뻤지만 말입니다. 그런 날의 양색시 누나들은 정말 천사 같았습니다.”

 

여기에다 대고 미군 기지, 양공주, 식민지 그런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아이는 눈부시게 이쁜 여인의 자태에만 홀리고 맙니다. 그게 참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 안에 담긴 슬픈 비밀을 알기에는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고 그런 단서들이 되는 사건들은 그의 이야기 속에 마치 숨겨진 플롯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골 소사에서 그때만해도 서울의 촌동네 답십리, 그리고 충무로로 이어지는 그의 삶의 경로는 60년대의 서울을 떠올리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 가장이던 아버지의 우여곡절 인생도 그렇게 탐사하는 서사로 펼쳐집니다. 지독히 매를 들었던 아버지, 그의 수감, 엄마의 사랑, 그 사랑의 눈물이 지닌 의미들은 그 시절 소년의 체험과 노인이 되어가는 세월의 회상이 만나면서 비로소 완전한 서사로 정리됩니다.

 

인간의 생애란 이렇게 체험 자체로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건 시간의 방에서 다시 만나고 만나면서 그 의미를 얻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리워서, 괜히>는 고달픈 시대의 위로가 됩니다. 아픈 기억들조차 따뜻하게 되새기는 저자의 영혼이 가진 온도의 힘 때문일 것입니다.

 

두고 온 그 모든 것들이 그립습니다. 제 삶에 들어와 제 삶이 된 사람들이고 시간들입니다. 그들은 제 인생이었습니다. 삶 자체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에 의해 채워지고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리고는 고마움을 이렇게 표합니다.

 

그 시간들, 그 사람들로 인해 제 인생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때로는 많이 힘들기도 하였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제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다만 저자의 것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워서, 괜히>는 그렇게 우리의 영혼에 깊은 자욱을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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