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실 반장 일을 보고 있는 병철 씨가 얼마 전 딸을 낳았습니다. 첫아들 규성이에 이어 둘째로는 딸을 낳았습니다.
아기 낳기 전날까지 하루 종일 고추모를 같이 심었던 부인이 다음날 새벽녘 배가 아프다 하여 차를 불러 원주 시내로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별 어려움 없이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엄마 따라 새로 난 아기도 건강했습니다.
병원을 다녀오는 병철 씨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둘째 아기를 건강하게 잘 낳은 것도 그렇고 첫째가 아들이라 은근히 둘째로는 딸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낭랑한 아기울음 오랜만에 동네에 퍼지게 되었고 모처럼 흰 기저귀 널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끝정자로 내려가다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보니 개울둑 저만치 누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병철 씨였습니다. 못자리를 한 논을 보러 나왔다가 봄볕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올 겨울 병철 씨는 논을 새로 샀습니다. 못자리를 한 논은 물론 그 논에 연이어 붙은 제법 큰 논 서너 개가 이번에 새로 산 논이었습니다. 병철 씨가 손으로 새로 산 논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새로 낳은 아기 이름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할머니와 엄마 아빠가 의논해서 짓는 게 좋겠다며 일어나 끝정자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문득 병철 씨가 고마웠습니다. 젊은 사람 떠날 대로 떠난 농촌에 남아 꿋꿋하게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위해 반장 일을 보는 거야 새삼스러울 게 없는 든든함입니다.
새삼스레 병철 씨가 고마웠던 건 아기 낳고 농사지을 땅 늘리는 그런 단순한 삶의 모습이 단순함을 넘어 무언의 메시지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젊은 부부가 아기를 낳는 거야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왠지 그런 모습이 버려진 땅에 씨 뿌리는, 버릴 수 없는 땅을 지키려는 땅에 대한 농부의 비장한 다짐처럼 여겨졌습니다. 사람들 뿌리 뽑히듯 떠나간 황량한 땅에 더욱 깊게 뿌리 내려 서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농사지을 땅을 늘리는 모습 또한 그랬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포위된 절박한 상황 속 갇혀 있으면서도 사람을 시켜 땅을 샀던 예레미야의 모습이 병철 씨 모습과 겹쳤습니다.
위급한 상황,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 피난 갈 궁리를 하는 것이 옳았을 텐데 땅을 사다니,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만 그건 하나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확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묵는 땅이 늘고, 어떻게든 전답을 정리해 도시생활의 밑천을 삼으려는 뭇 젊음을 두고 그런 흐름을 역행하듯 논을 사들인 병철 씨. 그저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갈 뿐 이런 얘길 들으면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적어도 내겐 둘째 딸을 낳고 땅을 사들인 병철 씨 모습은 결코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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