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5)
현세종교 내세종교?
시마조노 스스무(島薗進)라는 분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종교학자이며 오래도록 도쿄대학 종교학과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지난 2013년 은퇴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으며, 죠치대학(上智大学) 신학부의 특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 그분이 펴낸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현대 일본의 종교현황, 특히 여러 신종교의 발흥을 중심으로 그들이 가지는 종교사적 의의를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설명한 책이었다. 이 책은 『現代救済宗教論』으로 일본에서는 1992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말로는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1997년에 번역되었다.
스스무 선생에 대해서는 독일 유학시절부터 박사 과정 동료였던 순이찌라는 도쿄대 출신 친구로부터 쉼 없이 들어왔기에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종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내게는 그의 종교 이해와 서술의 방향이 매우 거칠고 조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스무는 그의 책에서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의 종교이해 방식을 수용하면서 원시종교-고대종교-대종교-신종교-신신종교-신영성운동 등 진화론적 도식으로 종교사를 정리하였고, 거기에 ‘내세구원’-‘현세구원’-‘현세이탈’ 등의 병행구조를 대입하여 종교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내 눈에 이런 스스무 선생의 의도와 기획은 좀 이해하기 곤란했다. 거기에 그리스도교, 이슬람 그리고 불교 등을 내세구원의 대표인양 거론하는 그의 과감함과 무모함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이고도 천재적인 종교학자가 이런 거칠기 짝이 없는 종교관을 지니고 있다니!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워낙 이들 종교가 내세를 강조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이들 종교 스스로 자신의 소망을 내세에 둔다고 반복해서 너스레를 쳤기에 ‘내세지향적’이라는 이들 종교에 대한 평가는 크게 무리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평가의 주체가 종교를 연구하는 이들이라면? 그건 좀 문제가 되겠다. 이런 손쉬운 평가를 내리는 종교전문가는 이미 전문가라 칭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내세보다는 ‘현세’를 강조한다. 지금의 평안과 행복은 저버린 채 내세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정상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사실 꼼꼼히 살피자면, 내세를 강조하는 많은 경우는 다양한 현세의 이익을 손에 쥔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그렇게 전용할 때가 많다. 허나 우리 인간사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종교들이 지향하는 바는 사실 바로 '여기', '지금'에 있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정토종 계열은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정토라고도 불리며, 아미타불의 정토를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먼 서쪽에 존재하는 이상향을 지칭함)에 대한 강조가 집요하긴 하지만, 불교의 본질을 어느 정도 맛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사후에 들어가게 될 어떤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린다. 그런 점에서 서방정토는 불교적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방편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불교라는 종교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나를 비롯한 존재의 구성 원리를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나’(我)라는 것은 실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대별되는 다수의 존재유형(panca khandha, 五蘊)이 임시로 모여 있는 일종의 집합적 존재이고, 바로 그것을 온 몸으로 깨달게 될 때 집착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극락’이니 ‘열반’, 그리고 ‘서방정토’라 내세우는 것은 모두 특정한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현세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서에서 언급되는 ‘하느님의 나라’(basileia tou theou)란 ‘신의 통치’, 혹 ‘다스림’을 뜻한다. 하느님의 나라, 즉 천국을 죽어서 다다르는 공간적 개념만으로 제한하거나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그리스도교의 천국은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는? 그건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살아서 우주와 생명을 창조한 신을 만났는데 왜 죽은 다음을 염려해야 하는가? 신체험 이후에도 죽음 이후가 걱정되거나 두렵다면, 먼저 그 체험의 진실성 여부를 재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는 신이 인간과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즉 이 용어는 신자들이 사후에 들어가게 될 특정한 공간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통치를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윤리적, 실천적, 수양적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내세를 강조하는 종교에서 재림은 왜 선언하는가. 그토록 현세가 싫고, 지겨워서 내세로 진입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내세에 들어가 있다면, 그리고 신을 고백하고 수용한 이들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구태여 재림을 통해 이승을 정화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교의 재림이야말로 이 종교가 얼마나 현세의 구원을 희구하는지 보여주는 결정적 힌트가 된다 하겠다.
예서 더 많은 종교들의 사례를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이쯤에서 정리한다. 실제로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고, 현세의 유쾌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종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꾸 종교를 내세의 것이라 규격화하는가? 난 오히려 이 구도 속에 숨어있는 권력관계가 더 궁금해진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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