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이하 저자)는 <눈 떠 보니 하나님이더라> ‘여는 글’을 교회와 성당에서 성서 완독 권고를 받는 교인들이 레위기와 성막 제작 방법을 지루하게 서술하는 출애굽기 25장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매년 좌절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성서 통독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제사장이나 성막 제작자들에게 필요한 내용은 헌법과 다르지 않는 성서 본문이 아니라 일반법이나 그 법의 시행령이나 시행 규칙에 따로 담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전문적인 내용을 헌법에 포함시켜 얻는 이득보다는 성서가 너무 지루하고 따분해 매번 교인들이 ‘작심삼일’하므로 잃는 피해가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시행령 정치에 지치다 보니 시행령 성서까지 떠오르는 걸까.
표정과 말과 제스처만 보자면 우리 개신교 목사나 신학자들의 겸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쉽게 읽을 수 있는 신학 서적 만나기가 가뭄에 콩나듯 어렵다. 쉽게 알아먹을 수 있게 책을 쓰는 일에서 목사나 신학자의 겸손이 빛을 발하면 좋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초신자들까지 쉽게 읽을 수 있게 신학 책 쓰기가 거의 불가능한지, 아니면 목사나 신학자들이 쉽게 쓰기를 우선 순위에 두지 않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으로 쉽게 읽힌다는 점을 꼽겠다. 오랫만에 성서를 주제로 쓴 책다운 책을 읽었다.
가볍게 시작해 보자. 저자는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논리학 내지 성서 사색 훈련을 제대로 시켜 준다. 결혼식 때마다 부모를 떠나라(창세기 2:24)는 설교를 평생 들었지만 “아담, 하와에게는 부모가 없으니 그들이 부모를 떠난다는 서술은 논리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138쪽)는다는 걸 상기시킨 목회자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보통은 교회에서 천지창조를 배울 때 첫째 날부터 엿새까지 무엇이 지음을 받았는지에 관심을 집중한다. 창세기 1장 3-5절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는 말씀에 “그렇구나”하며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저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없는데 어떻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단 말인가”라며 성서 본문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든다(63쪽). 성서를 이런 관점에서 읽으라고 가르쳐 준 목사나 선생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나만 그런가.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창세기 1장 14-19절에 따르면 해와 달은 넷째 날에 지으심을 받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나님은 셋째 날에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라 말씀하신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해가 없는데 어떻게 식물이 살겠나”(67쪽)라고 반문한다. 물론 신학자들은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엔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고,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저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며 일축한다. 그게 맞다고 해서 저자의 상식에 근거한 과학적 반론이 무의미해 지는 건 아니다. 대다수 교인들이 성서를 읽거나 묵상할 때 저자처럼 과학을 근거로 합리적 질문을 던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비신학도 교인들에게 합리적, 과학적 사고 방식의 성서 읽기와 묵상 방법을 제시한 저자가 고맙다. 이 책을 추천하는 두 번째 이유다.
논리학 내지 묵상 훈련으로 독자를 가볍게 책을 시작한 저자는 역시 쉬운 말로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저자가 어렵지 않은 말로 꼭 한걸음 더 나아간 가르침은 교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칠 때 후렴처럼 반복해야 할 내용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목사들이 후렴처럼 반복해 강조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십일조, 주일 성수, 동성애 반대, 한 가족 같은 교회 다니기 등등 아니던가. 그에 비하자면 저자의 다음 지적은 얼마나 신선한가.
“이성을 믿음의 적으로 여기는 신자들이 있다. 성서를 읽을 때 이성은 제쳐두고 오직 믿음으로만 읽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실상 이들은 이성을 제쳐둔 게 아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이성을 쓸 뿐이다.”(45쪽)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 깨어 있다고 믿고 있는 목사들도 “이성을 믿음의 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은 한다. 그렇게 가르칠 때 목사의 표정에서 그런 말을 한 멋진 자신에게 도취된 듯하게 보이는 건 문제지만 말이다. 저런 목사들의 가르침이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저자는 “믿고 싶은 것만 믿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이성을 쓸 뿐”인 신앙인들의 고질적 문제를 지적한다. ‘이성을 어느 동물보다 더 동물적이 되는 데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 없었다면 제노사이드(인종 청소)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저자의 지적(91쪽)은 서늘하다. 성서를 읽고 연구할 때는 “성서를 해석하는 나를 해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 또한 우리가 찬송가 후렴처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 들어야 할 내용 아닐까. 저자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성서를 자기 신앙에 ‘맞춰서’ 읽거나 ‘맞추기 위해’읽는 신자들이 있다. 자기 신앙에 끼워 넣으려고 성서를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 성서가 수천 년 전에 쓰인 문서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는다. 자기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쓰인 책이란 사실도 감안하지 않는다. 신관, 인간관, 세계관 등이 자기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대착오적으로 해석하면서 그런 줄도 모른다. 성서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교리의 틀에 맞춰서 성서를 해석하기도 한다.”(46쪽)
다음으로는 <눈 떠 보니 하나님이더라>에서 처음 배운 내용이다. 저자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처음부터 유일신은 아니었다’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소개한다. 이스라엘의 초기에는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비교적 후대에 유일신교가 되었다는 얘기다.(81-82쪽) 고대 중동문화권에서 신상(神像)은 신의 형상과 같으며 그게 뜻하는 바는 신의 내적인 성품이나 성격이 아니라 외모였다는 내용도 처음 읽었다. 그 문화권에서는 신의 형상은 왕이나 제사장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어서 일반 백성은 감히 신의 형상을 상상 할 수 없었으나(85쪽), 성서의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혁명적이라는 이야기다. 고대 중동문화권에서 지식과 죽음을 연결시킨 적이 없는데 창세기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부터 이미 지식과 죽음을 연결시켰다는 주장(124쪽)도 인상적이었다.
성서를 그리 깊게 알지 못하는 기독 지성인이라 하더라도 관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얼굴에서 확신과 자신감을 읽을 수 있던 건 그것이 창세기 공부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와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중요한 하나님과 하와 사이의 대화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읽어낸 대목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자신이 내린 명령을 어겼는지보다 누가 벗은 몸인 걸 알려줬는 지가 더 궁금했던 점은 의미가 있다. ‘관계’에 깊은 관심이 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관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163쪽)
창세기를 배울 때 생긴 관심사 하나를 나누고 싶다. 이제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내 눈으로 구약을 읽으며 가장 전율했던 순간 중 하나는 동물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복을 준 장면(창세기 1:22)이었다. 모든 것의 기원을 담고 있다고 알고 있는 창세기의 선포였기에 충격은 대단했다. 이 말씀에서 충격을 경험한 이후 동물만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내 인식을 바꾸어야 했다. 복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그 다음 문제였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다스림 대상 중 하나로 지정한 동물에게 인간보다 앞서서 복을 줄 수 있는지 이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하니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나 4:1),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복음 10: 29)는 등등의 말씀이 이 말씀과 연결되며 그 관계들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창세기 1장과 2장의 물고기, 짐승, 새들의 창조 내용이 각기 다르다는 내용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1장에서 물고기, 짐승, 새들은 하나님이나 인간과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2장은 아담이 홀로 있는 걸 좋게 보지 않은 하나님이 사람의 고독 해결을 위해 배우자 후보로 동물을 창조했다(125쪽). 1장이 사실이든, 아니면 2장이 사실이든 그 자체는 적어도 내겐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1장이든 2장이든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짐승과 새들의 존재 가치가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이젠 조금 아쉬웠던 점을 말할 차례다. 예를 들어 보겠다. “랍비 조나단 색스는 ‘처음’으로 번역된 ‘쉬트’에는 ‘전체’ ‘기초’ ‘원칙’의 의미도 있다고 설명한다. ‘처음’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23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것 말고도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에 나오는 원어 풀이가 많이 나온다. 그렇기에 신학에서 어떤 문장 속의 단어를 해석하는 원칙 내지 규칙을 상기시키고 논의를 진행했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책임의 거의 전부는 내가 이제까지 들어온 설교나 성경공부이다. 대다수 설교자의 원서 사용에서 참 답답할 때가 많았다. 한국어라 하더라도 신라나 고려로 가면 외국어보다 소통이 어렵다고 배웠다. 하물며 수천 년 동안 기록된 성서의 언어는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보통 설교자들이 참고하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사전(또는 성서 주석)의 단어 뜻풀이는 충격적으로 단순했다. 거의 예문이 제시되지 않은 채 1,2,3…으로 단어 뜻풀이를 하는 책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물론 신학자나 전문 연구자까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단어는 문장, 조금 넓히자면 문맥 속에서 그 의미가 규정된다. 그렇다면 사전에 그 단어의 뜻이 열 개든 스무 개든 그 문장 속에 적합한 뜻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서 원어를 가져와 그 뜻을 풀이하며 하는 많은 설교에서 그런 원칙이나 규칙이 잘 적용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읽으며 의문이 생겼던 대목 이야기를 조금 해 보자. 첫째, 저자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천지창조를 신화로 해석하는 입장을 취한다.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네 줄기로 갈라져 흘렀던 강(창세기 2:10)을 설명한 대목을 살펴 보자. 저자는 하나님이 동산을 거닌 시간이 한낮이고, 더운 지역이었다는 성서의 기록만으로는 동산 위치 추적이 어렵다고 말한다.(157쪽) 그 얘기에는 이런 의문이 생긴다. “에덴동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의미와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141쪽)다면, 또는 “신화로 창조 이야기의 의미가 결코 반감”되지 않는다면 굳이 에덴의 위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둘째, 저자는 창세기 3장 15절(“내가 ……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를 메시아 예언으로 해석한 신학에 이의를 제기한다. 창세기 3장 15절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원죄 교리,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이 ‘사탄’이었다는 해석이 첨가되어 ‘원시 복음’(proto-evangelism)으로 신학화했다며 이 사례를 ‘과잉해석의 본보기’(168쪽)라고 한다. ‘원시 복음’은 중학교 시절 처음 들은 기억이 난다. 신학교를 거쳐 지금까지 ‘원시 복음’은 내게 신구약 성서를 풀어내는 대원칙 비슷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저자의 주장에 찬성하든 아니면 지금까지의 입장을 고수하든 꽤 많은 공부가 필요하게 생겼다. 문제는 그걸 꼭 밝혀야 하겠다는 열정이 내게 남아 있는지 여부다. 그걸 확인하니 조금 쓸쓸해 진다.
‘원시 복음’보다 좀 더 무겁게 다가온 사안은 천지창조를 다루는 창세기 1-3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한 문제와 관련된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두 이야기에 “서로 모순 되는 내용도 있으므로 논리에 부합하려면 둘 중 하나를 제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놔뒀다면 거기에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터”(12-13쪽)라고 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공관복음처럼 각기 저자가 서 있는 위치나 출신 또는 관심이 다른 데서 생긴 관점의 차이, 그러니까 팩트가 아니라 의견의 차이라면 다양성 존중 차원이기에 아무런 문제를 못 느낀다. 그러나 만약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가 팩트의 차이, 그러니까 맞고 틀림의 문제라면 이야기는 매우 달라져야 하지 않나.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찰스 P. 스콧이 말한 "의견은 자유이나, 사실은 신성하다" 가 신학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다음의 설명도 꽤나 무겁게 다가온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혼돈과 무질서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쓰면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은 신이 되고 그것들은 창조하지 않았다고 쓰면 하나님의 만유(萬有) 의 주재자일 수 없다. 독자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그건 독자에게 달렸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후자를 택했다. ‘한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혼돈과 공허, 어둠과 깊음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썼다.”(42-43쪽)
위의 말을 한 저자가 이 책의 주 독자를 목사와 신학자로 상정했을까. 그걸 거 같진 않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정도 무게를 가진 신학적 주제를 두고 독자에게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만인제사장 설에 걸맞을 만큼 일반 독자를 존중한 듯하여 기분이 좋긴 하다. 그러나 만약 이 대목이 사실이라면 나는 과감하게 신학 내지 신학자 무용론을 펼치고 싶은 충동에 빠져든다.
저자는 구약성서에서 뱀은 사탄이 아닌데 기원전 1세기경 신학자들에 의해 사탄으로 신분 상승했음을 상기시킨다.(180쪽) 창세기 3장에는 뱀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짐승’(창세기 3:1)일 뿐인데 악의 화신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앞서서 저자는 창조 이야기가 여러 성경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변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신구약 성서 전체에 나오는 뱀, 옛뱀, 용 등의 연관 구절이 적지 않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그렇다. 그렇다면 창조 이야기처럼 뱀과 관련된 성서 구절을 창조적 변주로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는 것일까.
개인적 관심 때문에 더 중요하고 크게 다가왔던 문제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 기원을 설명하는 신학에 펼친 반론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다음 기회에 따로 길게 쓰고 싶다. 이미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으니 말이다. 저자의 어록, 또는 이 책에서 건진 몇 문장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구약성서는 숨과 피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배타적으로 생명과 연결하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경험에 앞서는 추측은 없고 실험을 이기는 가설도 없다. 생명과 죽음에 관한 어떤 추측과 성찰도 일상의 경험보다 앞서지 않는다.”(굵은 글씨는 필자,115쪽)
“아담과 하와가 숨었던 이유는 진실을 묻는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전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임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아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자신을 투신(投身) 하겠다는 각오까지를 의미한다. 지식의 반대는 무지(無知)가 아니라 투신의 부재다. 선을 위해서, 그리고 악과 싸우려고 자신을 던지지 않는 지식은 무지와 다를 바 없다. 인식론과 윤리를 뗄 수 없는 이유다.”(굵은 글씨는 필자,159쪽)
“오직 왕과 제사장만이 신의 형상을 소유한다고 믿었던 문화권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나눠줬다고 선언한 창세기 1장의 혁명적인 신학을 오늘날 되살려 내는 게 우리의 과제일 터이다.”(92쪽)
지강유철/전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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