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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

나는 까막눈

by 한종호 2023. 3. 14.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까막눈이 되었네
보이는 세상은 태초의 흑암

불과 100년 전에 쓰여진
우리 조상의 역사서도 
나는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도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도 
나는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홍익인간의 단군이 나온다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도 가믈가믈 현묘하다

중도와 중용도 모르면서 
중3학년이 되어 치른 중간고사에서 올백을 맞았을 때(음악 빼고)

눈먼 기쁨 그 너머로
별통별처럼 스치던 깨달음

지금 학교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아무 쓸데없는 장난을 치고 계시는구나

교실의 칠판을 그대로 
선생님 입말을 그대로

절대 믿음
절대 복사

그렇게 나는 까막눈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문득 가슴으로 스친 그 한 톨의 진실을

국민의 의무교육 정규과정인 학교를 모두 졸업하며
비로소 나 홀로 지구별 학교에 입학하기로 한 날

흑암 같은 나의 가슴밭에 
움트기 시작한, 먼지 한 톨의 의심

'나는 누구인가?'
점점 자라난 커다란 의심은 초발심(初發心)

억겁의 억겁(億劫而億劫)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 소식
그 너머 아득히 먼 한 점

오늘 아침에도 어깨가 무겁도록
천가방에 세 권의 책을 도시락처럼 챙겨 나왔다

그대로 들고 나왔다가
그대로 들고 갈 줄 알면서도

눈도 못 뜬 마음에게 
떠 먹이는 밥 한 숟가락에도 마음은 족하리라

그리고 아마 오늘밤에도
가슴에 품고서 이 미명의 몸은 잠에 들 테지

아직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선사(禪師)의 글씨, 그 씨앗 한 톨을 

까만 밤하늘이 별을 품듯
내 어둔 마음이 품는다

- 20230312 앞 마당에, 동백꽃과 매화와 목련이 나란히 꽃피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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