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퍼지는 메시지>
시편 19편 시인은 우주에 가득 찬 언어와 말과 소리를 두고서 다음과 같이 읊는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개역/개정 ‘선포하고’, 공역 ‘속삭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새번역》 시편 19:1-4a)
피조물인 하늘과 창공이 말한다. 피조물인 시간(낮과 밤)도 말로 정보를 전달한다. 시인의 역설(逆說)이 나온다. 이 우주에 언어가, 말이, 가득 차 있어도 들리는 소리가 없단다.(안 들려!) 다음 행에서 이 역설이 한번 더 뒤집힌다.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4a)고. 하늘과 창공이 우주 안에서 같은 언어로 말해도 소리가 안 들리고, 안 들리니 전달되는 메시지가 없기는,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말이나, 설교집에 활자로 전달되는 설교라고 예외일까. 우리의 설교에는 한국어라고 하는 ‘언어’가 있다. 언어 행위로서의 ‘말’이 있다. 청력을 지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적절한 음량을 갖춘 ‘소리’가 있다. 읽는 이들을 위한 ‘글’이 있다. 이것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전달하는 ‘정보’나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어떤 귀는 그 소리를 듣고, 어떤 귀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도 있다.
김민웅 목사(이하 설교자)의 설교집 《하늘은 나를 얻고》가 나왔다. 그의 목회 현장에서는 언어, 말, 소리로 이 설교가 선포되었었다. 지금 우리에게 이 설교는 말이 아닌, 활자 매체로 전달되고 있다. 말로 전달될 때도 소리가 안 들려 그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은 비록 활자 매체로 전달되어도 독해(讀解)를 거부하고 문해(文解)를 외면하면 이 설교집에 담긴 설교 역시 독자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도 하늘이 말을 퍼붓고 궁창이 이야기해도 귀가 막혀 있으면 안 들리듯이.
<설교 속 하나님의 모정(母情)>
설교자는 그의 설교 「첫날의 깨달음」에서 창세기를 가리켜 “절망에 빠진 이들을 위한 기록” “고난의 시절에 쓰여진 책”으로 규정한다. 설교자는 또 “창세기는 고난받고 있는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과 만나 새 롭게 인생의 출발을 하게 된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기록자들이 자기들이 살던 땅에서 뿌리뽑혀진 채 당대의 제국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선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서 설교자는 창세기 1장 2절(“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과 신명기 32장 11-12절(“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라는 두 본문을 융합하여,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어미 독수리의 새끼 사랑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니냐고?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서 ‘움직이고 계셨다’라는 것과, 어미 독수리가 둥지를 드나드는 새끼들을 공중에 높이 떠서 보살피느라 날개를 ‘퍼덕인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같은 말 ‘락하프’다. 그리고 이 말은 히브리어 구약성경 전체에서 창세기 1장 2절과 신명기 32장 11절에서만 나온다. 그리하여, 성경 주석자들이 나오기 전부터 히브리어 언어학자들이 성경어구사전과 관주(貫珠)를 만들 때 같은 히브리어 ‘락하프’가 창세기 1장 2절과 신명기 32장 11절에 나온다는 것을 밝혔고, 상상력이 풍부한 주석자들과 설교자들이 이 두 본문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모정(母情)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의 설교자는 드디어 그의 설교 「첫날의 깨달음」에서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라는 본문의 대목에서, 이 움직임이 갖는 성경 본래의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어미 새가 커다란 날개를 펴고 그 주위를 감돌면서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한다.
<설교자와 번역 성경>
설교자 김민웅은 그의 설교집 서문에서 말한다. “성서는 《새번역》을 사용했다. 번역이 충실하고 현대 우리 언어생활과 맞기 때문이다.” 1993년 부활절에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이 나왔다. 대한성서공회는 출판에 앞서 《새번역》의 시험본(trial edition) 1천 부를 인쇄하여 각 교단에서 추천하는 목회자 1천 명에게 돌려 고견을 구했다. 많은 의견이 들어왔고, 번역실에서는 목회자들의 의견을 번역위원회에 넘겨, 재론을 요청했고, 고견이 반영된 결정판을 간행했었다.
아마 2000년이 시작되기 전인 어느 여름이나 가을 즈음이었을 것 같다. 대한성서공회 번역실에서 나는 미국 뉴저지 길벗교회 담임 김민웅 목사의 방문을 받았다. 나를 찾아온 그가 1993년에 출간된 《표준새번역》 전도서 11장 1절을 문제 삼는다. 《개역성경》의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가 《표준새번역》에서는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에게 선의의 양식이 되리라는 기대를 담은 본문을 어쩌자고 해외무역에 투자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하는,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발상으로 본문을 왜곡할 수 있느냐는 항의를 받았다. 《개역성경》의 모호한 번역보다 1992년에 나온 현대영어역(TEV)의 “Invest your money in foreign trade, and one of these days you will make a profit.”이 더 낫겠다 싶어서 위원회에서는 《표준새번역》(1993)이 TEV 번역을 수용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그후 1996년에 나온 NIRV 역시 “Put your money into trade across the ocean. After a while you will earn something from it.”이라고, 같은 번역 경향을 보였으므로 2001년 《표준새번역 개정판》에서도, 2004년 《새번역》에서도 이 번역을 개정하지 않았다. 다만 김민웅 목사가 지적한 “번역에 반영된 자본주의 논리” 비평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당시 《표준새번역》이 국내보다 해외 교민 사회에서 더 신속히 보급되었었는데, 시험본 배부 대상에 해외 목회자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다.
<역사 속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
이 설교집의 마지막 설교 「배 오른편의 비밀」에서 설교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스라엘 역사에 깊이 관여했던 제국의 지배 역사, 흥망하는 제국의 하수인 노릇을 한 이스라엘 지배계급의 횡포와 수탈을,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 5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배, 4세기 알렉산더 그리스 제국의 지배, 로마제국의 출현,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선봉에 선 정복 전쟁, 이스라엘의 로마 식민지화, 여기에 항거한 기원전 2세기 마카비우스의 민중 봉기, 반제국주의 투쟁, 잠시 누린 이스라엘의 독립, 기원전 37년에 나사렛 남부 도시 세포리아에서 일어난 민중 반란,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을 진압한 뒤 수천 명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하는 참극, 예수시대 갈릴리 나사렛은 바로 그런 세포리아 반란의 기세가 남아 있는 현장이었음을 지적하고, 제국주의의 억압과 민중의 항거 역사를 하나님 나라 도래의 신학으로 해석하는 과제를 제시한다.
설교자는 이것을 그대로 우리의 역사에 접목한다. 개혁군주 정조가 죽고 권문세가들의 세도정치가 권세를 부린 19세기 초반에서 1백 년의 시기는 홍경래(洪景來)의 반란(反亂)에 이어 진주민란, 그리고 급기야는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1900년대에서 1904년에 이르는 활빈당의 출현, 1948년 4・3 제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한 신학화 작업을 시도한다.
<설교자의 성경 본문 주석>
설교자가 설교의 기본 자료로 선정한 성경 본문은 일반적으로는 설교를 뒷받침하는 자료다. 20편 설교 전체에서 설교자는 그의 설교가 이본문에 입각한 것임을 매번 충분히 설명한다. 각 설교의 상당 분량이 성경 본문에 관한 해설이다. 해설에는 설교자가 터득한 주석적 견해가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설교에서 청중에게, 혹은 독자에게 성경 본문 내용과 본문의 의도를 충분히 설명한다.
기본 본문 외에, 선포되는 메시지의 구체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보조 본문을 설교 현장에서 그때그때 적절히 그리고 넉넉히 제시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기본 본문 외에, 많게는 15개 안팎의 보조 본문이 선정되어 설교에 보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설교 「고난이 기른 선(善)」은 기본 본문이 창세기 37장 23-24절, 50장 19-21절이다. 그런데 실제 설교 안에서는 이 본문 외에 창세기 37장 2, 3, 4, 6-11, 13-28, 15-16절; 39장 4, 6-10, 11-20절; 41장 1-8, 14, 31-36, 41절; 마태복음 5장 4-7절 등이 실제로 더 인용되어 있다. 성경적 근거와 지원이 없는 메시지는 전달하지 않는다는 증거 제시가 과민할 정도가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곳 본문을 증거로 제시하면서도 성경 본문의 내용과 문맥, 본문의 배경을 설명할 때 설교자의 능숙한 스토리텔링은 듣는이/읽는 이가 재미있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제한된 지면에서 일일이 예를 들지 못해 아쉽다.)
딱 한 곳, 그의 설교 「주님, 우리가 칼을 쓸까요?」에서 설교자는 난해한 본문(누가복음 22:38)을 다룬다. 설교자가 주석들 사이에서 대립하는 견해를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독자를/청중을 미로로 데려가기도 하는, 이 드문 예를 잠시 짚고 가보자. 이것은 설교자의 결함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신약 본문의 난해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 칼을 준비하라는 것과 칼 두 자루면 넉넉하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하나로 묶으면, (칼을) 준비하긴 하되 두 자루 정도면 된다는 것입니다.”(「주님, 우리가 칼을 쓸까요?」)
그리스어 ‘히카논 에스틴’의 문자적 의미는 꼭 “(칼 두 자루가) 넉넉하다”라는 말은 아니다. ‘넉넉하다’라는 서술어의 주어는 그리스어에서는 ‘칼 두 자루’가 아니다. 영어 번역들이 보여주듯이, 그냥 특정 대상을 지칭함이 없이, 문맥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는 말이다. 현재 문맥에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랍비가 비유로 하는 말을 문자로 들으니, 그들의 랍비가 더는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됐다!” “그만하자!”(“It is enough!”“That’s enough!”)라고 하는 뜻이다.(대다수 주석) 번역에 따라서는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고대 시리아어역, 아랍어역, 에티오피아어역 등은 ‘넉넉하다’의 주어를 복수로 번역한다.(“They are sufficient.”) 이런 번역은 “칼 두 자루면 넉넉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번역이다. 코이네 그리스어 신약본문의 반영도 아니고, 이런 번역을 따르는 다른 언어 번역도 더는 찾기 어렵다. 누가복음 22장 38절 번역에서 New English Translation과 New American Bible은 각각 다음과 같은 각주를 제시한다.
“예수의 말을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으니까 예수는 It is enough!라고 말하고 대화를 끝내버린다.”(NET 각주) “예수의 고별사는 갑자기 예수가 말한 It is enough!라는 말로 끝난다. 예수는 지금 제자들이 곧 당하게 될 세상의 적대행위에 직면하여 거기에 대처할 것을 비유적 언어로 말하는데, 제자들이 스승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스승의 말을 계속해서 문자대로만 알아듣기 때문에 예수는 더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계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NAB 각주)
<설교 속 아포리즘>
설교는 문학적 성격이 아포리즘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명상이 깊은 설교자 김민웅에게서는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압축한 짧은 글, 곧 금언, 격언, 잠언, 경구 따위를 쉽게 만난다. 설교 스무 편 전체에 40-50개의 아포리즘을 찾았다. 여기에서 극히 일부만 소개한다.
“주어진 현실이 제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파의 조건으로 변모하는 것이다.”(「축제의 사람, 그 영혼의 힘」)
“스스로를 구원하려면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야.”(「상처받은 영혼을 향해」)
“건너기 전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이들 탈출자들에게 죽음의 바다였으나 일단 건너면 그것은 누구도 쉽게 뒤쫓아와 범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가 된다는 점이다. 궁지와 위기를 어떻게 돌파하는가에 따라, 그 곤경의 현장은 우리 인생사에서 사지(死地)가 되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견고한 방어벽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마라에서 엘림으로 가는 길」)
“험곡에서 헤매다 지쳐 쓰러져 있을 양을 천신만고 끝에 찾아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다가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포옹.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발견한다.”(「편안한 어깨, 포근한 품」)
“나사렛 예수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을 향해 존재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인간을 향해, 인간을 위해 기쁨의 원천이 되기를 바랬고, 그것에 생명을 걸었다.”(「절정絶頂의 완성」)
“예수는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존(現存), 그 자체다.”(「사랑이여, 바람을 가르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는 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남의 수고와 노동을 착취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지, 일할 능력조차 없는 이들에게까지 한 말은 아니다. 먹을 권리와 생존의 존엄은 누구에게나 인정되어야 한다.“(「포도원의 비밀」)
이렇게 김민웅의 설교를 읽다보면 흔히들 성서를 보조도구로 삼고 다른 이야기로 빠져나가기 일쑤인 것과는 달리 상서 자체와 치열한 씨름을 하고 그 씨름의 과정에서 우리의 현실과 만나게 하려는 걸 절감하게 된다. 그는 성서를 기록한 이들의 고투에 찬 삶을 파고들어 그들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그 자신도 들으려 한 것이자 그로써 오늘날 고난을 겪은 이들의 삶에 그 음성이 일깨운 지혜와 믿음을 나누고자 한 것이다. 설교 속 김민웅의 아포리즘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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