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악보와도 같다. 악보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일종의 암호다. 작곡가가 음표 하나하나에 새겨넣은 곡진한 마음 그리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심어놓은 살가운 이야기를 누군가 해독해야 한다. 그 역할을 맡은 이가 연주자다. 같은 악보라도 연주자에 따라 달리 들리는 만큼, 연주자의 해석은 무척 중요하다.
설교자 역시 연주자다. 단순히 독자이기만 하다면 홀로 성경을 읽고 깨달아 실천하면 그뿐이지만, 설교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말씀의 신비를 풀어헤쳐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설교자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이자 설교자에게 현장이 중요한 이유다.
내가 20대에 처음 만난 ‘김민웅’은 설교자의 전형이었다. 미국 뉴저지 길벗교회가 그의 현장이었고, 거기서 전한 말씀이 《물 위에 던진떡》(한국신학연구소, 1995)으로 묶여 나왔다. 헌데 책으로 읽은 그의 설교는 전형성에서 한참을 비켜나 있었다. 이를테면 첫 설교에서 벌써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를 그는 완전히 새롭게 조명했다. 세상에, 이 이야기의 알짬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법정에 하나님을 세운 거라니. 피고석에 선 하나님이 세상에서는 때로 유죄판결을 받으나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진실을 믿는 것”(20쪽),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힘주어 외친다. 금기도 없고, 성역도 없다. 교조나 통념 따위는 개나 줘버려, 그런 기개와 자유가 그의 설교의 특징이었다. 가부장제가 기본값인 세상에서 한껏 짓눌려 있던 20대의 여성신학도가 ‘은밀하고 위대하게’ 전투력을 공급받았다고나 할까. 그러고는 한동안 ‘설교자 김민웅’을 잊었다. 티브이에서 정치평론가로, 대학에서 인문학자로 활약하는 그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다.
그가 다시 ‘설교자 김민웅’으로 돌아왔다. 아니다. 고쳐 말해야 한다. 사실 그는 한 번도 설교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정치적 발언에 힘쓸 때조차도 그 언어는 성서적 예언의 번역이었다. 거리의 단상이 그에게는 교회의 강단과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에 꽃자리에서 나온 설교집 《하늘은 나를 얻고》를 읽노라니 단박에 알겠다. 그는 천생 목사라는 것을. 그가 서 있던 모든 자리가 목회현장이었다는 것을.
이번에도 첫 설교에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흔하디흔한 창세기 첫머리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그의 손이 닿으니 다르게 요리되어 나왔다. ‘태초’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결정적으로 행동하시는 순간’”(51쪽)이라고 풀어낸다.
“낡은 인생을 되풀이하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 삶에 다가오셔서 결정적으로 개입하고 움직이시면 바로 그 순간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 인생의 태초’입니다.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52쪽)
이 ‘태초’로 인해 삶에 드리워진 고통과 상처, 그늘과 어둠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태초 이전의 어둠은 좌절과 낙담, 혼돈과 공허에 불과했지만, 태초 이후의 어둠은 낮을 위해 필요한 밑절미로 인식된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라. 저 혼자 살자고 스승을 세 번 부인했다. “영원히 땅에 묻고 싶은 ‘비밀스러운 상처’”(85쪽)에 포획당했다. 어둠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한 예수가 찾아오신다. 숯불구이 생선 밥상을 차려주신다.(「배 오른 편의 비밀」) 왜 그랬냐는 추궁이나 정죄 대신에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으신다.
“그 마음이 있으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떤 일을 하려는가가 관건입니다.”(88쪽)
야곱도 그렇고(「얍복 나루 이쪽과 저쪽」), 요셉도 마찬가지다.(「고난이 기른 선」) 아버지의 유산을 선취해 탕진한 뒤 돼지치기로 전락한 둘째 아들은 어떠하고(「하늘은 나를 얻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포도원 품꾼으로 불려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해 낙오된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포도원의 비밀」) 그들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니 빛이 보인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어둠이 그 이상 위력을 떨치지 못한다. 이게 창조다, 부활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음’에 새삼스레 밑줄을 긋는다. 특히 “마음이란, 생각의 들판에서 길을 만드는 근본이 되는 힘”(106쪽)이라는 문장을 곱씹어 읽는다. 이 간결한 문장을 낳기까지 설교자가 걸어왔을 무수한 길을 짚어본다. 이미지만 봐서는 ‘생각’, 그것도 냉철한 생각을 주장할 것만 같은 그가 ‘마음’, 그것도 애절한 마음을 강조하는데, 이 엇박자가 은근 매력을 더한다. 그러고 보니 광장의 투사로 각인된 그의 이미지가 실제의 그를 가렸겠구나 싶다. 아니 그를 광장으로 내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그러니까 ‘모든 죽어가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죽임 당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참 주인을 기다린 보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아리랑이었다. 잃은 양을 기어코 찾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오는 목자의 마음(「편안한 어깨, 포근한 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목자의 어깨는 생명이 고비에 처한 이를 평안하게 하는 어깨이며, 그로써 고단한 인생들이 그에 기대어 새 힘을 얻어 소생하는 자리입니다. …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다름아닌 이 마음으로 사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 마음이 우리의 뜨거운 육신이 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고생하며 지치고 허기진 심령에게 우리의 어깨와, 우리의 품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병들고 죽어가던 영혼이 평안함과 포근함을 체험하고 소생하도록 하는 일이며, 이를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는 일입니다.”(111, 114쪽)
그가 ‘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기이하다. 몸은 땅이며 자연이며 여성이다. 그의 설교는 곳곳에서 여성성을 뿜어낸다. 하나님을 어미 새에 비유할 때만 그런 게 아니다. 묵자나 김민기나 심지어 니체를 인용할 때도 그의 언어는 여전히 여성적이다. 류춘도를 언급하거나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소환하는 맥락이 다 그렇다. 세상의 작고 여린 것들과 끊임없이 눈을 맞춘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의병’(156쪽)으로 규정하는 듯하다. 자신의 설교를 ‘읽는’ 독자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한 파르티잔”(296쪽)이 되자고 도전한다. 그는 역시 투사다. 우리더러 함께 ‘의병투쟁’을 하자고 선동한다. 이 투쟁은 자본과 권력이 야합해 인민의 삶을 질식시키는 ‘야만적 짐승의 세계’ (323쪽)와 맞서는 일이다. 이렇게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를 때조차도 그의 언어는 남성적 지배 언어로 기울지 않는다. ‘칼’의 한계를 아는 까닭이다. 그것으로는 ‘섬김’을 열쇳말로 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는 지배 권력과 한판 대결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강자들의 소굴로 들어간 것에 주목한다.(「어린 나귀의 힘」)
“우리의 승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승리할 때에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156쪽)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에서 ‘한 권의 책’을 ‘한 편의 설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나는 믿는다. 김민웅 목사님의 설교에는 그런 힘이 있다. 우리 안의 얼어붙은 세계가 여지없이 깨진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또하나의 세계. 가난하고 힘없고 약하고 모자란 존재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축제의 현장. “조금 더 친절하고 섬세해지고 싶은 마음”(7쪽)에서 ‘명상 노트’를 달았다는 목사님의 배려가 오히려 애교스럽게 보인다. 설교집의 새로운 진화다. 나이 들수록 이렇게 부드러워지는 남성 설교자가 나는 참 좋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법이므로.
구미정/이은교회 목사, 숭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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