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그것도 종교개혁주일에 “악법을 저지하고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2백만 명이 모인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예수가 길거리에 다니면서 세상을 둘러보는 것을 반가워할까? 또는 교회에 와서 목사들의 설교 듣기를 원하기는 할까? 예수께서 교회에 들어오시면, 거 누구요, 당장에 나가시오, 하지는 않을까? 왜 그런가 하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아니 이런 강도들의 소굴을 봤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비지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타락시키고 말았구나, 하시면서 크게 역정을 내시지 않겠는가?
도대체가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많은 경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같다.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온통 제 교회만 알고, 배부르기에 욕심을 내고 이웃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지 않고 으리으리한 건물 짓기에 혈안이다, 뿐인가?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망가지고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 몰라라한다. 강도만난 이를 구하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과”편이 생각난다. 예수가 교회에 오자 종교지도자들은 질색을 한다. 자기들이 이제까지 설파해온 것들이 모두 거짓으로 들통이 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를 교회 밖으로 몰아낸다. 제발 나가달라고. 그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그리 멀지 않다. 이들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예수의 이름만 필요하고 예수의 가르침과 그 존재는 도리어 거추장스럽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치 지도자로 이야기가 옮아가면 더더욱 가관이다. 이들은 정치에서 자신들의 신앙적 가치를 구현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예전에 기독교 대통령, 또는 장로 대통령이라는 이명박 씨를 보면 세간에 나도는 말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이권을 잡았다는 말이 실감난 적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가 잘 다니는 절이 “불법사찰”이고 그 절의 주지승이 “최시중(당시 방통위원장)”이며 가장 좋아하는 꽃은 “민영화”라는 조롱이 나돌았겠는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것은 종교의 제도적 권력이 정치를 압도할 경우이다. 종교가 정치의 발전을 위해 도전하고 충고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독교는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자기 배부를 일만 좇아다닌다. 정치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질타는 아예 없다. 권력에 아부하거나, 또는 종교를 업고 권력을 쥘 생각만 한다. 이리하여 한국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의 가치관을 정치에 반영해서 이웃사랑과 정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 평등한 인간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누가 그걸 시비 걸겠는가? 그런데 솔직히 한국교회가 하는 꼬락서니가 영 말이 아니니 이런말을 듣고도 변호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런 판국에 대형교회 목사들은 광장에 모여 가짜 예수를 판다. 진짜 예수는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다. 그래서 예수는 밀실에 갇히고 만다. 광장의 시대에 밀실에 감금된 예수는 기가 막히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예수 이름을 앞세워 온갖 제 욕심을 채우고 히히덕거린다. 천벌이 두렵지 않을까? 이러니 말로는 예수를 믿자면서, 사실은 하나도 믿지 않고 있는 것만 같다는 얘기다. 가짜 예수쟁이 아닐까?
서울 강남 부촌의 교회들은 거의 한결같이 이 나라 복지정책의 확대를 원하지 않는 신자들이 다수다. 투표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만드는 제도와 세금을 거부하고 있는 이들이 정말 기독교신자일까? 예수께서 어느 날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했는데 그에 응하지 못한 바로 이 부자처럼 대형부자 교회들은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다들 낙타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있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니 말이다. 저 잘났다고 온갖 제 자랑을 하고 나섰는데 이 부자 청년, 그 꼴이 말이 아니게 됐고,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 나라, 영생 어쩌구 하더니 사실 관심있는 것은 자기 재물이었다. 이 나라 부자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모습이 똑 요렇다고 하면 과장일까?
신자유주의 체제 이래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고, 가난한 이들이 살아갈 길은 더더욱 막막해져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고민은 찾아볼 수가 없다. 먹을 것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생긴 이들의 문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해결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여전히 이를 외면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다가 한국교회는 이렇게 시장의 논리를 숭상하게 되었을까?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결단력 있게 맘몬의 제사장들이 되고 있다. 그걸로 거들먹거리고 있으며, 기세를 떨친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재력과 권력을 내세우는 이들이 한국교회의 중심에 있기에 이렇게 한국교회는 골병이 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진짜 예수는 밀실에 갇혀 죄수처럼 지내고 있는데, 이들이 파는 가짜 예수의 오래된 약(구약)과 새로 만든 약(신약)이 교회라는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그걸 먹으면 어찌 될까? 바로 그게 아편이다. 세상의 고난을 모르는 척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정신이 몽롱해지는 아편 말이다. 그걸 먹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결국 아편 장사 아닌가? 세상에 어떤 이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지, 누가 부패한 권력으로 제 사심을 채우고 있는지, 어떤 부정의가 판을 치고 있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게 만든다. 아편에 빠진 종교인들은 결국 하나님과 대적한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두 사탄의 편에 선다.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불법행위라고 여긴다.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어 몸부림을 치면 과격하다고 난리를 핀다. 부자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들은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을 범죄자처럼 대한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버릴 판이다.
도대체 우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세상과 교회 앞에서 진정한 신앙은 어떻게 해야 복구될 수 있을까? 결국 가짜를 폭로하는 일이 우선이다. 아니면 진짜를 식별하지 못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삯군 목자를 먼저 구별하도록 이르셨던 것 아닌가? 제 뱃속을 채울 욕심에 찬 가짜 목자들을 가려내지 못하면, 백성들은 속는다. 따라서 우리가 당장에 할 일도 가짜를고발하는 일이다. 가짜가 판명되어야 진짜가 역사에서 주역을 맡을 수 있다. 아니면, 세상은 또 다시 진짜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한번 못 박히신 것으로 부족해서 또다시 십자가에 처형당해야 옳겠는가?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교회라는 사실이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참일까? 예수를 말실에 가두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다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는 이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사탄의 협력자일 뿐이다.
부디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밝게 떴으면 좋겠다. 예수님 당시에도 결국 백성들의 무지와 몽매가 한몫 단단히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는 속지 말아야 한다. 밀실에 갇힌 예수님이 광장에 나와 진짜임이 맑혀지려면 가짜부터 정리하자. 기독교로 장사하고 자기 욕심 차리는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일이 시작된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척 하면서 딴 궁리나 하지 말고, 예수 앞에 먼저 바로 서야 한다. 아니면, 강한 비바람이 불어 올 때 그 무너짐이 더욱 심할 것이다. 모래 위에 쌓은 높은 집의 붕괴는 초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종호의 '너른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로 꽂는 비수(匕首) (0) | 2024.10.30 |
---|---|
설교 베끼기, 위선의 깊이만 더해가고 (0) | 2024.10.04 |
한 순례자의 시선 (0) | 2023.05.05 |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가? (0) | 2022.11.23 |
환멸의 강을 사랑으로 넘을 때 (1) | 2022.09.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