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신학자, 목회자들의 성경 읽기는 무엇이 다를까? 그것은 단지 젠더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그 차이에 담긴 시선, 사회적 경험, 해석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같은 성서 텍스트라도 그 서 있는 자리, 사회적 존재로서 겪게 되는 일상은 다른 관점, 전망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을 《새 시대 새 설교》라고 붙인 까닭 또한 그런 의미를 담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위주의 강단이 쏟아내는 설교, 메시지가 하나의 교리, 교조 내지는 정식처럼 여겨지는 현실은 여성적 관점의 배제, 여성이라는 젠더가 포괄하는 기존질서로부터 변두리화된 존재의 육성을 지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억압된 목소리, 경험, 관점의 복구를 열망하게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복구의 지점에 서 있다. 물론 이로써 그간 묵살 되어 오거나 배제대상이 된 목소리 모두가 복원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여성 신학자, 목회자의 육성을 들어본 바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그 목소리가 노출되는 것 자체가 급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목소리의 중요성을 주목해주는 시선이 없다면 그 또한 어려운 길이 되고 만다. 이 책은 그런 시선을 기대하고 있다. 독자들은 그 시선이 되어 여기에 수록된 메시지, 설교를 깊이 읽어나가 준다면 고맙겠다.
이들 여성 신학자, 목회자들의 설교에 대해 일종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다섯 분의 신학자, 설교자, 문화비평가에게 부탁드렸다. “성경을 읽는 새로운 시선/김기석”, “한국교회의 위기를 이겨낼 강단의 모델/김민웅”, “새 시대 새 설교/민영진”, “파니 멘델스존이란 여성 작곡가가 떠오른 건 왜일까?/지강유철”, “왜 여성에 대한 여성의 설교인가/차정식” 이렇게 다섯 꼭지가 그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설교를 남성 신학자와 목회자, 문화비평가에게 맡긴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젠더의 차이를 전제로 서로 소통하고 그 의미를 짚는 대화자로서의 한 주체로 받아들인다면 이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들 다섯 분은 여성 설교에 대해 심사를 하거나, 평가를 내리는 역할이 결코 아니다. 남성 위주의 신학계, 목회 현장에서 이분들은 젠더 차원의 의식과 태도가 우선 남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과 같은 요소를 지니지 않는 분들이다. 그러기에 이런 소통과 대화가 의미 있다.
여성들의 말하기를 이를 남성들에 의존해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남성 위주로 세워진 벽을 깨는 일을 하는 동역자, 동지라는 차원으로 보아주면 좋겠다. 그런 관점에서 다음을 읽으면서 여기에 담긴 설교들을 대할 수 있으면 이 책의 소임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여성 설교자들이 곳곳에 성서의 여성들을 조명했듯이 사실,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역할은 그 의미가 깊다. 우선 그의 어머니가 되는 마리아를 보아도 우리는 그녀가 단지 수동적으로 성령으로 잉태한 한 시골의 처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녀는 당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껴안고 있었고, 시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실현되기를 매우 적극적이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여인이었다. 패배주의와 운명론적 사슬에 묶여 자신의 삶과 시대의 불행을 탓하기만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그녀의 찬가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새로운 생명의 시대를 열어나가게 되는 기쁨을 확고하게 고백하고 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46-49)라고 하면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분명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누가복음 1:51-53)
마리아는 이 노래를 통해서 권력과 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오만한 자세로 살고 있는 이들이 언제까지나 떵떵거리며 시대를 호령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과 행동 앞에서 졸지에 무력해질 것을 내다본다. 그리고는 가난과 고통과 힘겨운 삶에 짓눌려 있던 이 세상의 작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체세력으로 우뚝 일어설 것을 예견한다. 이 마리아의 찬가는 그리하여 그저 한 여인의 기도로 그치지 않는다. 시대를 넘어서 모든 가난하고 약하며 현실을 감당하기에 힘이 없는 작은 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압축된 기도가 된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삶 속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후 세상의 약한 자들을 가리키면서 “이 작은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은 하나님의 시선이 누구에게 머물러 있는지, 그래서 인간사의 새로운 활로를 어떻게 뚫어내시려는 것인지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여성 설교자들이 곳곳에 전하는 것처럼 크고 강한 것을 숭상하는 시대에 작은 존재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배우고 깨닫지 못하면 어느새 인간은 크고 강한 것에 복종하고 그에 기회주의적으로 들러붙어 선과 의를 내버린 채 사는 타락과 죄악에 빠지게 되어있다.
마리아는 이와는 달리, 작은 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이들에게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을 힘을 주시려는 하늘의 응답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여 그녀의 몸은 그저 몸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린 생명의 능력이 충만해질 대로 충만해진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곧 예수 탄생의 현장이 되는 힘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이 몸으로 태어나는 모든 자리에는 바로 그렇게 이웃의 아픔과 시대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고 살려는 존재가 가진 영혼의 아름다움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는 바로 이 영혼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얼마나 충만하게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자칫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종교적 포장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직시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필요에는 절절하나 이웃의 필요에는 무관심하거나 또는 냉정한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비난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함께 이기적인 신앙인도 더욱 증가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래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몸으로 짊어지고 살려는 간절한 기도와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이웃의 아픔은 보이지 않은 채, 언제나 자신의 필요만을 먼저 앞세우는 신앙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이 아름답지 못하면 그곳에 하늘의 능력을 품은 생명의 진정한 탄생은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진정 이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깊이 품어내는 여성의 힘을 지니고 계신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하면서 이스라엘의 현실을 아파했던 예수님의 탄식은 바로 그 대목을 일컫는 말씀이다. 경쟁과 지배와 폭력과 기만으로 얼룩진 이 시대를 새롭게 살릴 힘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품어 되살리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얻는 것 외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태어나 충만해지는 것이며, 진정 부요해지는 길이다. 모두가 목마른 시대에 새로운 비전이 실린 열여섯 분의 여성 목소리를 여기에 소개한다. 읽고 기쁜 마음이 되었으면 싶다.
*여성 설교의 현주소와 미래 전망(차정식)https://fzari.tistory.com/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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