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2)
늬들이 구약을 알어?
1.
대단한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저런 이유로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구약성서는 독자들에게 대단히 불친절한 책이다. 어떻게든 많이 읽히겠다는 의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구약성서는 그런 책이다. 하긴 어떤 경전이 많이 읽히려고 글을 쓰고 재미있게 쓰였겠냐마는….
구약성서는 ‘이야기’(story)와 ‘설화’(narrative)가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형식만 보면 다른 경전들에 비해 재미있을 수 있는 책이다. 재미있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전체적으론 재미없는 책임에 분명하다. 구약성서가 재미로 넘쳐나고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한 명도 못 봤다. 여러분은 본 적 있나? 아마 없을 거다. 있다면 그는 구약성서 전문가가 되도록 타고난 사람이든가 재미란 게 뭔 줄 도통 모르는 사람, 둘 중 하나일 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구약성서를 ‘율법’이라고 불러왔다. ‘율법’이란 말은 히브리어 ‘토라’(torah)를 그리스어 ‘노모스’(nomos)로 잘못 번역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고 강제하는 법률이 근간이란 오해가 생겼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에겐 ‘구약성서=율법’이란 도식이 뇌리에 박혀 있다. 일단 그렇게 되면 고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좁은 의미의 ‘율법’인 법률 규정은 양적, 질적으로 지배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이야기’와 ‘설화’가 더 많다. 그래서 ‘구약성서=율법’ 보다는 ‘구약성서=이야기/설화’가 더 적절한 도식이지만 전통과 관습이라는 장벽을 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당분간 구약성서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기는 어려울 게다.
이야기/설화만 끄집어내서 읽는다면 구약성서는 그리 재미없는 책은 아니다. 이야기/설화의 종류도 제법 다양하다. 벌어진 사건에 교훈을 적절히 섞어서 기록한 역사 설화(historical narrative)가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꾸며낸 얘기도 있다. 두 종류 모두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지만 그걸 담는 그릇이 다르다. 상징성이라곤 찾을 수 없는 메마른 얘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무궁무진한 상징들로 가득한 얘기도 있다. 그러고 보면 구약성서 저자들에게 가능한한 많이 읽히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구약성서는 그냥 읽는 것보다 형식을 따져가며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문학 형식이란 관점에서 보면 구약성서는 매우 다채롭다. 앞에서 이야기와 설화를 얘기했는데 그 외에도 시(詩)가 있고 역사 서술(historiography)도 있으며 법전도 있다. 짧은 격언도 있고 비유(parable)와 우화(fable)도 있다. 우화 중에는 역사 서술처럼 쓰인 것도 있고 반대로 역사 서술임에 분명한데도 이야기처럼 쓰인 것도 있다. 사물을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묘사한 얘기가 있는가 하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설명해주지 않고 빈 공간(gap)으로 남겨놓은 얘기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글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그게 어떤 문학 형식에 담겨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구약성서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빈다’는 우스개 말이 있다. 구약성서에 대해서도 그런 짓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웃자고 하는 얘기는 그냥 웃으면 된다. 그게 그 글의 목적이니 말이다. 안 그런가? 거룩한 경전인 성서에 우스갯소리가 어디 있냐고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예후다 T. 라다이(Yehuda T. Radday)와 아달리아 브레너(Athalya Brenner)가 편집한 On Humor and the Comic in the Hebrew Bible나 윌리엄 웻비(William Whedbee)이 쓴 The Bible and the Comic Vision이란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럼 그런 말 못 할 거다. 전자는 이름에서 보듯이 유대인이고 후자는 포모나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0여 년 전에 암으로 죽었다. 특이한 점은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유대인 아내 덕분에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점이다. 흔치 않은 일이다. 어쨌든 두 책은 구약성서가 얼마나 유머로 가득한 재미있는 책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책이다.
이와는 반대로 심각한 얘길 하고 싶은데 글이 너무 무거우면 효과가 줄까봐 일부러 우화처럼 가벼운 형식에 담았다면 독자는 우화에만 정신이 팔려 웃다 말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메시지를 파악해야 한다.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면 그렇단 말이다. 안 그런가? 시(詩)는 시로 읽어 문학적 영감과 감흥을 느끼고 감동하면 된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시라는 문학 양식이 가장 잘 맞으니까 그렇게 한 게 아닌가 말이다. 시적인 표현을 두고 과학적으로 옳으니 그르니 따지거나 교리에 맞니 안 맞니 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짓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리스도교가 이런 짓을 해왔으니 그 어리석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긴 구약성서를 재미있게 읽자는 거다. 기왕 읽을 거면 재미있게 읽어야겠고 또 아직까지 읽을 맘이 없던 사람도 그게 재미있는 줄 알면 혹 읽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여기서 ‘재미있게’ 읽는다는 말은 ‘제대로’ 읽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내 경험으로 구약성서는 ‘제대로’ 읽어야 맛이 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서의 얘기들이 어떤 그릇(문학 양식)에 담겨 있는지, 그리고 저자는 독자가 어떻게 자기 얘기를 읽기 바라는지 알아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한껏 모양 나게 시적으로 표현했는데 그걸 논문 읽듯이 딱딱하게 읽는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제 딴엔 다양한 상징들을 글에 녹여서 오색찬란한 그림을 그려놨는데 그걸 흑백으로 감상한다면 저자의 기분은 고사하고 글에 대한 예우겠는가 말이다. 또한 자기의 온갖 이성, 지성, 감성과 영성까지 동원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세계를 애써 고상하게 펼쳐놨는데 독자가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라는 한 마디로 밀쳐버린다면 그게 글과 저자에 대한 공정한 대우라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내 얘기는 기왕이면 구약성서를 재미있게 읽어야겠는데 그러려면 수고스럽더라도 개개 글들이 담겨 있는 그릇, 곧 문학 양식을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시는 시로 읽고 설화는 설화, 비유는 비유로, 역사 서술은 역사 서술로 읽자는 말이다.
2.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하나? 이젠 구약성서를 읽을 준비가 된 걸까? 아니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는데 현대인에겐 이게 문학 양식 따지는 일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다름 아니라 구약성서 얘기들 가운데 현대인의 건전한 상식과 보편적 양식으로 믿어지지 않는 얘기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예컨대 성서가 바다가 갈라졌다고 말하면 진짜 갈라졌다고 믿을 것인가? 태양이 멈췄다고 하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을 것인가? 물에 던진 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고 하면 그걸 그대로 믿고 나도 시험해봐야 하나?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사흘 동안 있다가 나왔다고 하면 그걸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략 1970년대까지 윌리엄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가 주도한 미국 성서고고학계를 지배해온 흐름은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 성서 설화의 역사성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누지(Nuzi)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조상들 얘기와 비교해보니까 비슷한 점이 많더라, 힉소스라고 불리는 가나안 출신 족속이 한동안 이집트를 지배한 걸 보니 요셉의 후손들이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았다는 얘기가 역사적 사실일 수 있겠더라, 또 주전 13세기에 가나안 여러 도시들이 불타고 파괴된 흔적이 많더라, 특히 여리고를 파보니 완전히 파괴된 층이 있더라, 등의 얘기들 말이다.
시내산 (출처: Wilhelm Joys Andersen (https://www.flickr.com/photos/wilhelmja))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믿고 싶고, 믿어야 하는데 그걸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이 발굴됐다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냐 말이다. 상당히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던 학자들도 이런 발굴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발굴들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지만 20세기 중반에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은 건 성서고고학의 조상인 올브라이트 덕분이었다. 오랫동안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구약성서 개론으로 널리 쓰였던 버나드 앤더슨(Bernard Anderson)의 《구약성서의 이해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가 바로 이 계열의 개론서다. 이젠 시대가 달라져서 이 책을 교과서로 쓰는 미국 신학교는 없다고 봐도 되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구약성서와 고고학이 분리됐다고 봐도 될 정도다.
고고학이 구약성서 이야기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면 완전히 왕따 당하는 분위기다. 물론 현재도 이스라엘 출신 고고학자들에게서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난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고고학이 성서학에서 완전히 독립됐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고고학자가 아니므로 내 의견을 낸다는 게 우습지만 구약성서의 이야기들과 고고학적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이야기가 벌어진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저자(수집자, 편집자, 설화자를 모두 포함해서)는 사건 현장에 달려 나가서 사건을 눈으로 목격하고 보도하는 기자(reporter)가 아니다(요즘에는 이것도 하지 않고 기사 쓰는 기자들도 있지만). 설령 기자라 해도 개인의 관점이든 언론사의 관점이든 특정한 관점을 갖고 보도하게 마련인데 성서 저자는 기자도 아니었으니 오죽 했겠나 말이다. 그렇다고 성서의 저자가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확고한 관점을 갖고 벌어진 사건을 해석해서 서술했고 이 과정에서 때론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과 정확성을 무시한 경우도 있었다는 거다.
3.
이런 얘기는 요즘 나온 구약성서 개론서나 이스라엘 역사서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굳이 여기에 쓴 이유는 앞으로 이런 관점에서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정작 하고 싶고 꼭 해야겠다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다.
사실 구약성서를 제대로 읽으려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고고학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거대한’ 얘기들이 아니라 현대인의 건전한 양식은 차치하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예컨대 뱀과 사람이 대화한다는 이야기(창세기 3장)나, 돌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이야기(열왕기하 6:6)나, 태양이 지지 않고 멈췄다거나(여호수아 10:13) 그게 열 칸 거꾸로 갔다는 이야기(열왕기하 20:11)나,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며칠 동안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요나 2장) 등의 동화나 우화 같은 것들 말이다. 어렸을 땐 이런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신기했지만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그렇다면 그는 병원에 가봐야 할 게다.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이런 이야긴 안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도 믿지 않을 이야기들이 구약성서에 등장하고 구약성서는 그걸 믿으라고 ‘강요’한다는 데 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상식으로나 과학으로나 말도 안 되니 내다버려야 하나? 아니면 하느님은 못 하시는 게 없으니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지나치게 말이 안 되는 건 내다버리고 그나마 ‘덜’ 말이 안 되는 건 믿어야 하나? 그렇다면 어떤 건 ‘너무’에 속하고 어떤 건 ‘덜’에 속하는지는 어떻게 결정하지? 상식에 어긋나는 걸 다 내다버리면 뭐가 남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또한 글자 그대로 믿는다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의문도 들고…. 그것은 똑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내 상식에 어긋나는 걸 내다버린다는 건 나를 하느님 위에 둔다는 뜻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과문(寡聞)해서인지 이 문제를 정직하게 다룬 글을 아직 읽지 못했다. 외국 학자 중에는 대놓고 그런 건 안 믿는다고 ‘선언’한 학자들을 많이 봤다. 그 중엔 자기 입장을 애써서 장황하게 해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런 건 일고(一顧)의 가치도 없다고 말한 사람들이 더 많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위에서 예로 든 얘기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 그러고도 어떻게 목사 노릇을 하냐고? 맞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목사 노릇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럼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었냐고? 천만에! 그렇지 않다. 그 얘길 필요할 때마다 몇 번이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피해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그럼 나도 이런 이야기들을 내다버리는 거냐고? 천만에! 그렇지 않다. 내 생각은 이렇다.
우선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걸 ‘전능’이라는 책상물림 용어로 표현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못 하는 게 없다고 믿었던 건 분명하다. 하느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다. 도끼를 물에 띄울 수도 있고 태양을 멈출 수도, 뒤로 물릴 수도 있다.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천사들을 시켜서 185,000명의 군인들을 하룻밤에 몰살할 수도 있으며(열왕기하 19장) 홍해를 가를 수도 있다(출애굽기 15장).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것도 요지부동으로 철석같이 말이다.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구약성서 시대에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으므로 그걸 확인하는 방법이 없다. 유일한 ‘증거’는 구약성서가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뿐이다. 그 얘길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내놓은 근거도 그게 전부다. 안 그런가? 그 외에 달리 그 얘기의 사실성(factuality)을 입증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성서에 나오는 이른바 ‘기적’을 합리적,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과거엔 있었지만 지금 그런 사람은 없다. 소수의 변증론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그런 일들이 ‘오늘날’ 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도 믿지 않는다.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과거엔 일어났으리라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내가 이걸 안 믿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런 일들을 일으켰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른바 ‘신관’이라는 것)에 내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나는 그들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신관은 철저하게 ‘종족주의’(tribalism) 신관이었다. 곧 자기들 신은 자기들만 위한다는 신관 말이다. 그들에게는 ‘보편주의’(universalism)란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런 생각은 구약성서 시대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싹텄다. 그 전까지 신은 만인을 위한 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들만을 위한 신이었던 거다.
위에 열거한 이른바 ‘기적’들이 왜,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따져보자. 철저하게 자기들만을 위해서, 곧 자기 원수에게 피해를 주고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일어났다는 거 아닌가.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을 더 죽이게 하려고 태양이 멈췄고 히스기야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불어넣어주려고 태양이 뒷걸음질을 쳤다는 거 아닌가. 나는 이런 신관을 그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런 신관에서 비롯된 얘기들을 믿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뉴스앤조이’에 가면 볼 수 있다(① 몰살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 ② 대량 살육도 주저 없는 성경의 기적, 믿으면 끝?, ③ 거짓말하는 하나님, 우리 편만 위하는 하나님).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나는 그들의 어떤 신관에서 그런 얘기들이 나왔다는 걸 ‘이해’한다. 그들의 신관이 갖고 있는 시대적 한계를 ‘이해’한다. 그들의 신관은 그들 세계관의 일부이고 그 둘이 어떤 관계인지를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진 않는다. 나는 그들의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 중에는 동의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내용이 더 많다. 나는 이해도 안 되고 동의도 안 되는 것을 믿을 수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 누구나 그렇다. 안 그런가?
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초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믿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곧 종족적 신이 아니라 보편적인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보편적인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종족적 세계관과 신관의 기반 위에서 쓰인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읽는다. 내가 하는 작업은 우선 구약성서 이야기들이 종족적 신관의 틀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이걸 따져보기 전에 구약성서에 보편적 신관을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현대인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관의 틀에서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고 재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려 한다. 물론 각각의 얘기들을 이런 전제에서 읽겠다는 얘기일 뿐이지 같은 얘길 반복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서론 격의 얘긴 이 정도로 하고 다음엔 선악과 이야기를 해보겠다. 제목은 ‘선악과, 하느님의 갑질?’이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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