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속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평화를 이룰 수 없다. 평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전인격적인 변화이다. 평화운동이 영성운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웬은 “평화를 만드는 일에 대한 성찰을 기도, 저항, 공동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힘주어 말한다.
“우리가 평화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평화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떠나 평화를 주시는 분의 집에 들어가야 한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거기서 사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를 존재로 부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활동이 기도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 쉽게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모질게 되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기도야말로 평화실천의 기본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평화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 나웬은 세상의 모든 파괴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항거는 핵무기나 압도적인 군사력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지배의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온갖 거짓된 안전이나 소속감을 벗어버리고, 모든 염려와 불안을 쫓아냄으로 지배의 환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기도로 인해 우리는 전쟁 무기, 미사일, 잠수함이 있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진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음으로써 핵 절멸조차 우리를 파괴시킬 수 없다는 그런 진리를 우리의 것으로 가질 수 있게 된다.… 기도에서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소멸시킴으로써 모든 인간적 파괴의 기초를 무너뜨린다.”(《헨리 나우웬, 기도하라 저항하라》, 63-4쪽)
기도는 평화를 만드는 행동을 통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항이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지향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저항이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아니오’인 동시에 모든 생명에 대한 ‘예’이다.
나웬이 특별히 심각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은 핵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인류이지만, 그의 시선은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는 핵전쟁을 가능케 하는 심성의 씨앗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미 뿌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료 인간에 대해 딱지를 붙이고, 범주로 나누고, 거리를 두는 행위 속에서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과 영화 그리고 현실은 폭력과 파괴와 죽음이 결코 낯설지 않은 일상임을 자각케 한다. 이런 파괴적 문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운동가들의 과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지속적이고 충실한 저항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공동체는 단순히 보호하는 역할 이상의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처음으로 현실화되는 곳이어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우리를 고립시키는 두려움의 장벽들을 지속적으로 허물면서 “고백과 용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드러나고 경축되는 약한 자들의 충실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동체는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요청 앞에 서곤 했다. 6세기의 성 베네딕토를 통해 수립된 공동체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 응답하고 중세 유럽에 새로운 사고와 삶의 양식을 제시했다. 13세기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중세 교회의 부와 타락에 대응하여 복음적인 삶을 지향하는 새로운 기풍을 수립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여러 공동체들은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나웬의 대답은 단순명료하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까지도 멸절시킬 수 있는 시대, 집단적인 자살의 위협에 직면한 시대와 그 시대 정신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새로운 희망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분노와 욕망, 적대감 그리고 서로에 대한 폭력을 고백하며, 거듭해서 서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베풀 때 그런 공동체는 자리잡기 시작한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신뢰하는 공동체라야 어둠의 세력에 진정으로 대항할 수 있다. 라르쉬 공동체를 세웠던 장 바니에 신부는 우리들 속에는 빛으로 변화되어야 할 어둠과 신뢰로 변해야 할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저항의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모체가 되어야 한다.
평화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리고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야만 할 길이고, 걸어야만 할 길이다. 지금 세상은 한국교회를 향해 권력의 패권에 투항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에게 시급한 과제는 교세 확장이 아니라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헌신이고, 저항공동체로서의 야성회복이다. 탈정치화된 복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 시대의 저명한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죽음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생명을 향해 ‘예’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당신은 바다에 많은 길을 내시어도> 중에서
김기석/청파교회 원로목사
*기도와 전항과 공동체(1) https://fzari.tistory.com/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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