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참 말이 그리운 시대

by 한종호 2025. 4. 7.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 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 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 을 이기지 못하였다."(요한복음1:1-5)

 

아련한 그리움으로 과거를 돌아보면서 때로는 후회하고, 또 때론 터무니없는 자부심으로 우쭐거리기도 하고, 혹은 절치부심하기도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뿐이리라.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의 뿌리가 과거에 맞닿아 있기에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가다보면 저 아득한 우주의 어둠처럼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기억의 소실점도 있게 마련이다. 탄생 이전의 기억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래서인가? 토마스 만은 말한다. “길이를 알 수 없는 시간 여행을 떠나면서 깊이를 가늠해 주 는 추를 매단 실타래를 풀고 또 풀어 봐도, 만물의 시원은 다림 추 앞에서 번번이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쳐버린다.”(《요셉과 그 형제 들》 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당도할 수 없는 뿌리, 시간을 일러 성경은 ‘태초’라 했다. 그러니까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우리 정체성의 시원이다. 요한은 그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한다. 과거형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사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말씀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요한은 말을 바꿔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참 어렵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어려울 것 없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어렵지만 이미지의 언어로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 파도는 바다의 일부이지만 그 자체가 이미 바다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과 구별될 수 없는 하나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한다. 말씀은 숨이 깃든 말(말숨)이다. 숨이 깃든 말씀이 발화되는 순간 사건이 일어난다. 빛과 어둠이 나뉘고, 땅과 푸른 하늘이 나뉜다. 푸른 움이 돋아나고, 해와 달과 별이 조화롭게 나타난다. 각종 생물과 인간까지도 등장한다. 말로 지어졌기에 각각의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어 있다. 세상 만물은 초월자의 암호인 것이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두 이레 강아 지만큼만 눈을 떠도 세상에 신비 아닌 것이 없다. 말씀이 창조의 힘인 것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사건을 일으킨다. ‘사랑해’라는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생명의 봄바람을 일으키지만, ‘네까짓 것’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 겨울 칼바람을 일으킨다. ‘고마워’라는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섬광과도 같은 빛을 일으키지만, ‘실망이야’라는 말은 상대방의 마 음을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우리는 말씀을 닮은 말을 통해 어 둠도 자아내고 빛도 자아낸다. 우리는 시방 말로서 우리가 살 세상을 짓고 있다. 시인 박노해는 깨끗한 말을 달라며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말/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 있지 않은 말을/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깨끗한 말> 중에서)라고 노래한다. 참 말이 그리운 시대이다.

 

요한복음 묵상집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중에서

 

김기석/청파교회 원로목사

 

* 좋구나, 이 말이여 https://fzari.tistory.com/31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