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 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 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복음 1:14)
영원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셨다. 오랜 기간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할 아기의 몸으로 태어났다.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엄마의 눈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두리 번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아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곧 칠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과 다를 바 없이 사셨다.
문득 막스 에른 스트의 그림 <세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성 모 마리아>가 떠오른다. 무슨 일 때문인지 마리아는 몹시 화가나 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자기 무릎에 엎드리게 한 후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아기 엉덩이에는 벌건 손자국이 나 있다. 경건한 이들은 대경실색할 그림이지만, 화가는 예수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말썽도 부리고 장난도 치면서 성장하는 것이 사람아니던가.
그런데 요한은 돌연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대체 무엇을 본것일까? 그것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 운, 다만 ‘생명’ 혹은 ‘빛’이라는 은유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있음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분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 현실 저 너머에 계신 초월적 타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는 마치 숲 속의 빈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 말이다.
요한은 그런 경험을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한마디로 요약한 것 이 아닐까?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좋구나, 이 말이여! 충만함이란 넘침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가득 찬 것을 밖으로 내놓게 된다. 불쑥 화를 내는 것은 속에 화가 차 있기 때문이고, 랄랄라 노래가 나오는 것은 속에 노래가 차 있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어깃장 놓는 사람은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심정에 북받친 사람의 입에서는 장미 꽃다발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를 가득 채우고 흘러넘친 것은 은혜와 진리였다. 은혜는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다. 예수는 세상에 건네진 하늘의 선물이었다. 그 선물은 수신자에 따라 치유로, 온전케 됨으로, 평화로, 화해로, 불의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다. 예수의 삶은 또한 ‘참眞’의 ‘열매實’로 가득했다. 지켜야 할 자아가 없었기에 거짓에 기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묵상집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중에서
김기석/청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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