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2)
나 찾아봐라!
- 잘 읽어보면 제법 짭조름한 요셉 이야기3 -
1.
이집트학(Egyptology) 전문가인 도널드 레드포드(Donald B. Redford)가 1970년에 쓴 《성서의 요셉 이야기에 대한 한 연구》 A Study of the Biblical Story of Joseph (Genesis 37-50)는 오래된 책이지만 요셉 이야기 연구자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필독서다. 거기서 그는 요셉 이야기에 사용된 50여 개의 단어들이 바빌론 포로기 또는 그 이후의 단어들임을 밝혀냈다. 그러니까 요셉 이야기는 그 시대의 산물이란 거다. 이에 덧붙여서 요셉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는 이집트 시대상이 기원전 7-5세기 또는 그 이후라는 데 근거해서 이야기 속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지만 얘기가 쓰인 때는 훨씬 후대인 포로기 또는 그 이후라고 주장했다. 이야기에 언약이나 자손, 땅 등 이스라엘 전통적 신학주제들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사실도 포로기 저작임을 주장하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곧 요셉 이야기는 포로기 이전엔 있지도 않았다는 거다. 레드포드는 이야기가 작성된 시기를 기원전 650-425년이라고 추정했는데 요즘은 이렇게 구체적인 연도까지 추정하는 학자가 별로 없는데 그땐 그랬던 모양이다. 용감하기도 해라….
레드포드의 주장 가운데 지금은 폐기처분된 게 많지만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이젠 정설로 굳어진 주장이 있는데 그건 디아스포라의 정신적 상황(diaspora mentality), 곧 자의든 타의든 고향 떠나 타지에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이 요셉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다는 거다. 그래서 이 얘기를 ‘디아스포라 우화’(diasporanovella)라는 장르에 포함시킨다. 그게 엄격한 의미에서 양식비평학의 장르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고향인 가나안 밖에서 쓰였다는 뜻은 아니다. 이 얘기가 가나안에서 쓰였는지 바빌론에서 쓰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 얘기에 스며있는 정신적 상황이 디아스포라의 그것이란 말이다.
요셉 이야기에는 가족사와 정치사가 잘 결합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주로 가족사가 전개되고 중반부에는 정치사가 주류를 이루며 후반부엔 가족사와 정치사가 섞여 있다. 이 얘기에 별도의 두 자료가 섞여 있다는 견해가 있다. 오경 전체가 네 개의 자료(J, E, D, P)로 구성된 것처럼 이 얘기도 가족사와 정치사라는 별도의 두 자료가 결합되어 이뤄졌드다는 얘기다.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는 얘길 지난번 글에서 했다. 그 주장은 얘기의 흐름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세 권짜리 방대한 주석을 써서 창세기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한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요셉 이야기를 가족사가 정치사로 발전된 것으로 봤다. 처음에는 가족사였는데 나중에 그게 정치사로 발전했다는 거다. 과연 그럴까? 그는 이 얘기가 야위스트 문서(J)에 속해 있고 다윗, 솔로몬 시대에 쓰인 두 개의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두 자료설을 주장한 셈인데 그의 주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요즘은 전통적인 자료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의 타당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중 야위스트 문서가 다윗, 솔로몬 시대가 아니라 훨씬 후대인 바빌론 포로기에 쓰였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간다는 점이다. 따라서 베스터만과 그와 유사하게 주장하는 학자들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든 형편이다. 영원히 옳은 주장은 세상에 없는가…. 창세기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한 베스터만도 시간은 이길 수 없나 보다.
2.
요셉이 형들보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이유는 그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었다(창세기 37:3). 그는 늦둥이였던 거다. 늦둥이가 부모의 총애를 받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야곱에겐 요셉보다 어린 벤야민이 있었는데 왜 야곱은 베냐민 아닌 요셉을 총애했을까? 베냐민은 야곱이 요셉보다 더 늦게 얻은 아들인데 말이다. 늘그막에 얻었기에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요셉에 아니라 베냐민에게 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 문제를 고대 해석자들이 그냥 넘어갔을 리 없다. 그들은 요셉이 형들뿐 아니라 동생 베냐민보다 부모의 사랑을 더 받았던 이유가 단순히 늦둥이여서는 아닐 거라고 봤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늘그막’ 곧 ‘노년’이 때로는 ‘지혜’와 동일시된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구약성서엔 둘을 연결시킨 구절이 제법 많다. 시편 105편 22절(“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게 하며 원로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게 하였다.”)과 욥기 32장 9절(“사람은 나이가 많아진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더 잘 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등이 그 예다. 이런 구절들에 근거해서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는 “그[요셉]에게서 비범한 모습을 발견한 그의 부친[야곱]은 깜짝 놀라서 그를 칭찬했고 다른 아들보다 그를 더욱 사랑했다.”고 썼다.
지혜문학은 고대 중동지방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문학양식이다. 요셉 이야기의 무대인 이집트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도 그랬다. 지혜문학도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다양한 부류로 나눠지고 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문학이 성격적으로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사색과 관찰, 실험 등을 통해 자연과 인생의 이치를 터득하려 했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지혜문학의 저자들은 세상만사의 배후에 신에 의해 작성된 구체적인 계획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일들이 신의 계획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거다. 이걸 파악하는 게 바로 ‘지혜’(wisdom, 히브리어로 ‘호크마’)라는 거다. 지혜자 또는 현자(sage)는 이와 같은 신의 계획을 파악해서 왕에게 조언을 주거나 왕가나 귀족, 사제들의 교육을 맡았던 사람들이었다.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이 지혜자의 역할을 했다. 창세기 41장 39절에서 그는 ‘지혜자’라고 칭해지는데(“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이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셨는데 너처럼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 이스라엘 조상들 중에 이렇게 불린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사실 요셉은 고대 중동지역의 지혜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표적인 게 ‘기다림’과 ‘인내심’(patience)이다.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느님을 믿고 꿋꿋이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 말이다. 형들의 손에 죽을 뻔했다가 종으로 팔려간 이후 요셉은 사실상 ‘낙오자’(underdog) 신세가 됐다. 재수에 옴 붙었다 싶게 지독히도 일이 안 풀리는 사내였던 거다. 이건 그의 성격이나 능력과는 무관했다. 그를 낙오자로 만든 것은 ‘운명’ 비슷한 거였다. 하느님이 그를 단련하려고 그랬다고 보기엔 역경의 강도가 너무 셌고 또 그런 목적이 들어 있다는 암시도 없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운명’이란 개념이 없다. 사람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모든 일의 배후엔 하느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얘기에선 하느님은 직접적으로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았고, 또 개입한다 해도 사람 눈에 띠지 않으니 우연처럼 보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요셉이 어찌어찌 해서 겨우 위기를 넘기면 다른 위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간 그는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했지만 Mrs. 보디발의 욕정 때문에 투옥된다. 그가 거기서 생을 마치나 했는데 다행스럽게 전직 고위관리의 꿈을 풀어준 덕에 불운했던 그의 생에 한 줄기 빛이 비추는 듯했지만 은덕을 입은 관리의 망각증세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관리를 망각에서 깨워준 것도 꿈이었다. 이번에도 꿈이 계기였다. 기이한 꿈을 꾼 파라오가 이집트의 모든 현자들을 불러들여서 꿈을 풀어보려 했지만 실패하자 그제야 술 시종장은 감옥의 요셉을 떠올린다. 그때 비로소 요셉의 운명이 순풍에 돛 단 듯이 흘러가는데 정치사에 묻혀서 잊혔던 가족사가 재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난관을 만나지만 어떻게든 극복해서 성공하는 요셉을 가리켜 ‘언더독’(약자)이라고 부른 사람은 수전 니디치(Susan Niditch)다. 그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언더독을 비교했는데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이 그들이다. 야곱과 요셉은 대조적인 인물이다. 야곱은 술수에 능한 속임수꾼이었던 반면 요셉은 술수나 속임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서 ‘지혜자’라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속임수꾼인 야곱이 적어도 두 번 하느님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면했는데 반해서 지혜의 화신 요셉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직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았을 뿐이다. 못난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게 하느님의 심정이었을까?
< "Holman Josephs Dream" ,the 1890 Holman Bible Wikimedia Commons. >
3.
이전 글에서 인용했던 로버트 알터(Robert Alter)는 제한된 형식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는 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했다. 멋진 말 아닌가! 요셉 이야기의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문학형식으로 역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래서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고 아니라고 봐도 무리가 없는 ‘야릇한’ 장르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세심하게 읽는 사람은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이야기로 옮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는 얘길 이끌어가는 동력이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얘기 자체 안에서 나오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선보였다. 이걸 세속의 눈으로 보면 ‘우연’이나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 거다. 곧 저자는 하느님을 운명이나 우연처럼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내용에 있어서도 저자는 이스라엘의 신학사에 중대한 획을 그었다. 왜 그는 하느님이 세상사에 직접 개입한다는 전제 하에 얘기를 풀어가지 않았을까? 다른 저자들은 그 전제 하에 얘길 풀어갔는데 말이다. 왜 그의 얘기엔 하느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나? 하필 요셉은 다른 집 아닌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고 왜 하필 Mrs. 보디발은 요셉에게 홀딱 반했을까? 그가 감옥에서 파라오의 술 시종장과 빵 시종장을 만난 건 또 어떤가. 왜 하필 그들이 같은 감방에 있게 됐나 말이다. 술 시종장은 왜 요셉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파라오가 꿈 꿨을 때 불현듯 그를 떠올렸을까?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필연’이라고 하지만 이 얘기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셉 이야기의 저자도 하느님이 세상사에 직접 개입한다고 서술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앞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간섭을 얘기 전개의 추동력으로 삼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간섭과 개입 없이 매사가 우연히 일어난 걸로 보일 정도로 하느님이 숨어서 활동한다고 서술하는 방식이었다.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은 전자였는데 그는 그걸 따르지 않았다. 물려받은 전통과 관습을 따르는 게 쉬운 길이었을 텐데 왜 그는 그 길을 가지 않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낯선 길을 갔던 걸까? 그는 왜 도움이 필요할 때 하느님이 보란 듯이 나타나 도움을 베푼다는 식으로 얘길 풀지 않았을까? 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야기의 저자들처럼 서술하지 않았나 말이다.
이는 그가 놓여 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요셉 이야기는 바빌론 포로기의 산물이다. 위에 제기된 의문을 푸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여기서 이스라엘은 남북왕국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에게 성전은 야훼의 집(the House of YHWH)이었다. 야훼의 영원한 거주지였던 거다. 야훼가 성전에 계시기 때문에 그게 있는 예루살렘도 영원히 안전하다고 그들은 믿었다. 산을 집어삼킬만한 풍랑이 몰아쳐도 성전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거다.
그런데 그 성전이 바빌론에 의해 무력하게 파괴되었다. 바빌론 군대는 성전의 귀한 물건들을 약탈했고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로써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서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어진 ‘언약’(covenant), 곧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이 깨졌다. 또한 야훼와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 곧 다윗의 가계에서 대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올 거라는 언약 역시 깨지고 말았다. 그뿐인가, 다윗이 계획했고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야훼가 영원히 거주하겠다는 약속 또한 깨졌다. 집이 파괴됐으니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게 됐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역사와 백성들의 삶을 지탱해온 종교체제가 붕괴되면서 이전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하느님의 일상적인 개입에 대한 믿음도 무너졌다. 그들의 상황이 하느님의 직접 개입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거다. 이제 야훼는 과거처럼 인간사에 일상적으로 개입하는 신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숨어서(hidden) 섭리로(providentially)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신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하느님의 직접 개입에 대한 믿음을 지탱해주던 신앙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서, 하지만 섭리라고 믿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찾아져야 했다.
4.
기독교 신학에서 ‘숨은 하느님’(the hidden God, 라틴어 전문용어로 deus absconditus)은 가톨릭 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게서 비롯됐다. 숨은 하느님은 사람들에 의해 직접 경험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명상, 사유, 실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신을 가리킨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휴식하는 하느님’(the idle God, 라틴어 전문용어로 deus otiosus)이 있다. 휴식하는 하느님은 세상사에 개입하는 데 신물이 나서 자기보다 낮고 더 활동적인 신에게 그 역할을 이양한 신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이신론(deism)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더 이상 거기 개입하지 않는 신을 가리킨다.
엄밀하게 말해서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휴식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한 후 이레째부터 안식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쉬고 있는 신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한결같이 일하는 신이다. 이른바 ‘계속적인 창조’가 그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시시콜콜 세상사에 참견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때론 그게 지겨워서 하위신들(lesser gods)에게 그걸 맡기기도 하는데 야훼에 대해서는 그런 건 상상도 못한다. 야훼는 아퀴나스의 ‘숨은 하느님’과는 유사점이 없지 않다. 그 유사점은 다른 데보다는 지혜문학의 하느님에게서 발견되는데 요셉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바빌론 포로기에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기들의 일상적인 삶이 하느님의 거룩한 영향권에 영향을 덜 받는다고 여기게 됐다. 이 말을 거꾸로 읽으면 사람이 신의 영향권 내로 진입하는 게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여기게 됐다는 얘기다. 기도해도 응답 받기가 더 어려워졌다. 성전이 없어졌으니 제사를 드릴 수도 없게 됐다. 곧 사람이 하느님을 움직일 길이 차단됐다고 느끼게 된 거다. 하느님이 세상사에 덜 개입하면서 덩달아 사람이 하느님 일에 개입할 길도 좁아졌다고 여기게 됐다는 말이다.
요셉 이야기의 꿈 얘기도 이런 점을 보여준다. 꿈이 뭔가? 여기서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 아니다. 우린 그렇게 보지만 구약성서 시대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리 없다. 그들에게 꿈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다. 꿈은 잠잘 때 꾼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낮에 꾸는 ‘백일몽’에 대해서 얘기한 적 있지만 대개의 꿈은 의식 없이 잠자는 동안 꾼다. 꿈의 내용은 꿈꾸는 사람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다는 얘기다. 꿈은 꾸고 싶다고 해서 꿔지는 것도 아니고 내용 역시 그렇다. 출세하는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그런 꿈이 꿔지지는 않는다.
요셉이 꾼 꿈도 마찬가지다. 형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그가 꾸고 싶어서 꿨겠나? 그게 아니지 않나 말이다. 꿈이 하느님 계시의 통로라면 그 내용은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꿈의 내용, 곧 하느님 계시의 내용이 맘에 안 들면 그걸 바꿔달라고 하느님께 빌어야지, 꿈을 꾼 요셉에게 화내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꿈의 내용은 꿈을 꾼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형들은 꿈의 내용 때문에 요셉에게 화를 냈다. 요셉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 책임도 없고 그걸 실현시킬 능력도 없는데 말이다. 꿈은 그걸 꾼 요셉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꿈을 바꾸는 게 아니라 ‘해석’하는 것뿐이다. 그게 지혜자들의 몫이고 요셉은 그걸 했을 뿐이다.
요셉 이야기에서 꿈이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는 사실은 당시 신앙적 상황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크다. 꿈이야 요셉 이야기 말고도 구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여기서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느님의 계획이 꿈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게다가 변경될 수도 없다는 식으로 전달된 사실은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도 인식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두고 야훼와 했던 ‘협상’(negotiation)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됐다. 야곱이 베델 및 얍복강 나루터에서 그랬던 것 같이 하느님과 직접 대면 역시 가능하지 않게 됐음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래서 ‘숨은 하느님’이요 ‘섭리’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제 하느님의 계획은 우연처럼 일어나는 세상사 속에 감춰져 있다. 믿음은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들이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은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임을 믿는 게 됐다.
하느님이 이처럼 소극적이 되니 사람이 전보다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했다. 흔히 요셉은 역경이 닥쳐와도 중심 잃지 않고 가만히 하느님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기다리고 지켜본 사람이라고 여겨져 왔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요셉은 한편으론 지혜자의 미덕인 ‘인내’의 화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적극적으로 사건과 맞선 사람이었다. 그는 힘/권력을 추구했다. 늘 넘버2였던 그는 넘버1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의 총애를 받았고 거기서 비롯된 권력을 십분 활용했던 인물이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도 그는 형제의 서열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2인자였고, 보디발의 집에서도 역시 2인자였으며 파라오의 궁전에서도 마찬가지로 파라오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힘/권력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믿었을까?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권력 가까이에 있으려 했던 걸까? 그는 하느님의 직접 개입이 사라진 상황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루는 길은 권력을 갖는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해바라기처럼 권력을 지향했던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것 역시 지혜자의 미덕 가운데 하나였다. Mrs. 보디발이 유혹했을 때는 물론이고 형들과 재회했을 때도 그는 자기감정을 잘 조절했다. 오랜만에 형들을 만난 데서 오는 울컥하는 감정을 성공적으로 억제했던 거다. 또한 그는 자길 사지로 몰아넣었던 형들에 대한 원한도 꾹 눌렀다. 자기의 계획을 꼼꼼히 진행시키기 위해선 그래야 했던 거다. 마지막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얘기의 흐름 상 그때가 자기 정체를 드러낼 적절한 때이기도 했으니 그게 의외였다곤 할 수 없겠다. 그는 감정 수위까지 자유자제로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5.
요셉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어느 정도는 존재했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부재한 분이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하느님이 부재한다고 믿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의 존재 또한 확신하지 않았다. 아무도 하느님의 직접 개입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요셉을 구덩이에 처넣어 죽이고 대신 짐승 피를 갖고 가서 아버지를 속이려고 공모했을 때 형들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는커녕 그로 인해 하느님의 징벌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렇게 행동했겠나. 또한 설화자는 하느님이 요셉과 함께 계셨다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건 설화자의 생각일 뿐, 요셉은 마치 하느님이 없는 듯이 행동했다. 나쁜 의미에서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본회퍼 말마따나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 행동했다. 그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겉으로 표현한 때는 형들에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느님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셨다고 고백했을 때(창세기 45:5)가 유일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느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전체의 흐름을 보면 요셉 이야기는 이스라엘 조상들과 출애굽 사건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조지 코츠(George Coats)의 말마따나 이스라엘 백성이 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갔는지를 설명해주는 얘기라는 거다.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까닭은 이스라엘 신학사에서 중대한 변화가 이 얘기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한 마디로 ‘less divine, more human’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세상사에서 신적인 것은 점점 줄어들고 인간적인 것이 점점 커진다고 말이다. 과거엔 하느님이 무대 위에서 감독도 하고 조명과 음향까지 담당하면서 연기까지 했다면 이제 하느님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연기뿐 아니라 조명과 음향까지 사람이 담당하게 됐다는 말이다. 요셉 이야기는 이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지혜문학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잘 나서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그래봐야 그걸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다. 하지만 동시에 지혜문학은 과거엔 하느님의 전유물이던 것들을 이제는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지혜’라는 거다. 지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날뛰지 말고 하느님이 하는 일을 잠잠히 지켜보라고 가르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와는 달리 하느님이 ‘숨어서’ 세상사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당신 계획을 드러내시니 사람은 적극적으로, 온갖 수단을 써서 그걸 파악하려 애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만히 앉아서 하느님이 개입하길 기다리기만 해서는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 권력이 됐든 뭐가 됐든 하느님 계획을 실행할 수단을 장악해서 적극적으로 그걸 성취하라고 가르친다는 말이다. 마치 세월호 상황에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얼핏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구약성서는 과감하게 한다. 그래서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뭥미?’ 라고 반응할 수도 있는 게 구약성서다. 하지만 세상사의 묘한 아이러니와 모순의 맛을 아는 사람에겐 구약성서의 바로 이런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니 이를 어쩌란 말이냐!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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