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by 한종호 2015. 5. 12.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3)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 아브라함 이야기 1 -

 

1.

 

목사와 버스 운전사가 천국에 갔는데 운전사는 대궐 같은 집을 배정받았고 목사는 초라한 집을 배정받았단다. 목사가 베드로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베드로 왈, “당신이 설교할 때 청중은 졸았지만 운전사가 운전할 땐 하도 위험하게 운전해서 승객들이 주여, 여기서 살려주신다면 교회에 잘 나가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너는 사람들을 졸게 만들었고 저 친구는 기도하게 만들었으니 큰집에 살 자격이 있는 거다.” 연설이 됐든 설교가 됐든 글이 됐든 지루하지 않아야 하는 건 매 한 가지다. 존 웨슬리는 설교시간에 한 사람이라도 졸면 설교를 중단했다지 않나.

 

이런 얘기로 글을 시작하는 건 이 글 내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얘기, 곧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던 얘기이기 때문이다. ‘다 아는 얘긴데 뭐 짭조름한 게 있을라구라고 생각할 터이다. 글쎄, 정말 그럴까?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뜻밖에 몰랐던 측면이 있고 영화도 다시 보면 첨에는 못 봤던 장면이 있지 않은가. 그런 맘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아브라함 집안사람들이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난 건 그가 주도한 일이 아니라 아버지 데라가 주도한 일이었다. 창세기 1131절이 그렇게 전한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창세기 11:31). 애초에 가나안 땅으로 가려던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데라였다. 그땐 아브람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가자는 대로 따라 갔을 뿐이다. 비록 데라는 목적지 가나안까진 가지는 못하고 하란에서 죽었지만 말이다. 그럼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모르고집을 떠난 건 아니다. 물론 데라가 최종목적지를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고대해석자들이 대답해야겠다고 느낀 물음은 대체 야훼는 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했을까?’ 하는 거였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얘기 서두에 이미 야훼가 그에게 축복의 약속을 줬다고 밝힌다. , 대체 왜 그런 약속을 했을까? 창세기를 지금의 차례대로 읽는 사람은 그가 누군지 아직은 잘 모른다. 아브라함이 뭘 잘 했다고 그에게 대단한 축복을 약속하는가 말이다.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말이다.

 

고대해석자들은 데라를 희생해서 아브라함을 살리려 했다. 그럴만한 근거가 없지는 않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연설한다. 야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에서 이끌어 내어 그를 가나안 온 땅에 두루 다니게 하였으며 자손을 많이 보게 하였다”(여호수아 24:2-3).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단다. 데라를 포함해서 말이다. 데라도 야훼를 몰랐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면 그는 왜 가나안으로 가려 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야훼의 명령을 따른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어땠나? 그는 자기 아버지와 달랐을까? 달랐다면 어떻게 달랐고 왜 달랐을까? 위에서 인용한 여호수아 연설에선 명시하진 않지만 달랐다고 전제하는 듯하다. 창세기 264-5절에서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니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만하면 고대해석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펴기엔 충분하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다고 해석하기에 넉넉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원전 2세기 문서로 추정되는 유딧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갈대아인임을 전제하고 그들 중 아브라함을 포함한 일부가 조상들의 관습을 버리고 새롭게 알게 된 하늘의 하느님을 예배했기 때문에 갈대아에서 쫓겨나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하게 됐고 그 후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 가나안 땅으로 옮겨갔다고 전한다(유딧서 5:6-9).

 

또한 희년서는 더욱 구체적이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에게 이런 우상들에게 우리가 무슨 도움과 유익을 얻겠습니까? 하늘 하느님을 예배하세요.”라고 말하자 데라가 아들아, 잠자코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널 죽일 거다.”라며 두려워했다는 거다(희년서 11;16-17; 12:2, 6-7). 하지만 그들도 이 이상으로 해석하진 못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야훼의 부름과 지시를 받았는지, 그는 뭘 근거로 그 부름에 순종했는지에 대해선 침묵하니 말이다. 하긴 모종의 해석을 덧붙이기엔 전승의 분량이 너무 적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야훼의 부름을 그가 전 존재를 걸만큼 중대한 일로 받아들었다는 거다. 그가 여행한 거리가 총 9백마일(1,440 킬로미터) 정도라는데 당시엔 그런 여행은 목숨을 걸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이스라엘이 하느님 안에 있는 가나안’(Canaan in God)을 찾아야 했는데 가나안 안에 있는 하느님’(God in Canaan)을 찾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단어의 순서 하나 바꿔서 이토록 다른 의미가 되게 만든 언어능력도 감탄스럽지만 하느님 안에 있는 가나안을 설파한 사상의 깊이에 더 감탄하게 된다. 지금도 땅을 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모름지기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한갓 땅덩어리 가나안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가나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걸 그들이 깨달았다면 지금 벌어지는 참상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각설하고, 이번에 살펴볼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야훼 하느님에게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얘기다. 이 얘기는 유명할 뿐 아니라 독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얘기이고 구약성서를 비판하게 만드는 얘기기도 하다. 세상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이 어디 있고 바치란다고 정말 바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나. 대체 누가 그런 신을 믿겠나. 요즘 같으면 아브라함은 영락없이 광신자라 불릴 게다. 오죽하면 이 얘기를 두고 칸트가 도덕률을 어기는 이런 명령을 하느님이 했을 리 없다고 단언했겠나.

 

얘기 서두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창세기 22:1) 이 일을 꾸몄다고 말한다. 이는 한편으론 놀랍고 다른 한편으론 김새는언급이다. 하느님도 시험을 해봐야 뭘 알거나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니 놀랍고, 처음부터 얘기의 성격을 시험으로 규정하여 달리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기에 허탈해진다.

 

야훼가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면 그에 대해 모르거나 확인할 게 있었다는 얘기다. 안 그런가? 여기서 교리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전지전능같은 것은 설화자에게 없다. 그럼 곤란해 할 사람이 많겠지만 말이다. 그들 가운데 하느님은 애초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았다고 억지 부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12절에서도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느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for now I know that you fear God)”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제 알았다는 말은 그 전에는 몰랐다는 뜻이 아닌가. 교리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이야기를 이야기로 읽는 게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얘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야훼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을 때(창세기 15) 자신이 어떤 신인지를 다 보여줬다. 자신의 패를 다 보여준 셈이다(이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더 얘기해보겠다). 그래서 야훼는 언약의 파트너 아브라함이 과연 자신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킬지 알고 싶었던 거다. 그의 됨됨이를 알아야 어떻게 대처할지 결정할 게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설화자는 불안했던 모양이다. 독자들이 야훼를 사람 제물이나 바치라고 명령하는 무자비하고 원시적인 신으로 오해할까봐 말이다. 그래서 서두에 이 사건의 목적을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라고 천명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되면 김은 새겠지만 그래도 그게 오해받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다. 나는 달리 해석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Sacrifice of Isaac, 1635 Rembrandt, Wikimedia Commons>


 

3.

 

애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침묵적막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하는 말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설화자의 설명도 장황하지 않다. 얘기에 여백이 많다. 독자가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백이 많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문제를 설화자는 잘 짜인 구조로 메운다. 청자(聽者)나 독자(讀者)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띠는 대목이다.

 

얘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은 누군가가 아브라함을 부르면 그가 대답하는 걸로 짜여있다. 첫 번째에선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아!”하고 부르고 그가 ,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야훼는 너는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라고 명령한다. 두 번째에선 이삭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다라고 대답했고 이삭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마지막에는 천사가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자 이번에도 그가 ,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천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느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세 번 모두 똑같이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한다. 대화 상대방과 내용은 다 다르지만 그의 대답은 똑같았다. 유대교에선 이 얘기를 아케다’(Akedah 또는 Aqedah)라고 부르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묶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번제로 바치기 위해 이삭을 묶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얘기는 위기가 발생해서 심화됐다가 해결되는 걸로 짜여 있다. 위기를 발생시키는 이는 야훼다. 아브라함을 시험하겠다는 거다. 그럴 이유가 있었나? 그가 그럴만한 빌미를 제공했던가?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었지만 그때 야훼에게 혼이 난 쪽은 속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속아서 사라를 취했던 파라오가 아니었던가. 설령 그 일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심스러워졌다 해도 그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란 시험을 할 정도의 일은 아니지 않는가. 더욱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은 비윤리와 패륜 강요를 뛰어넘는 엄중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삭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늦둥이만이 아니라 야훼가 그를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만들겠다고 약속한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삭이 번제로 바쳐진다면 야훼는 자기가 한 약속을 깨는 믿지 못할 신이 되는 셈이다.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다. 침묵이 유일한 반응이 되겠다. 그는 침묵하면서 여행 준비를 한다. 나귀 등에 안장을 얹고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 갖고서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난다. 그의 침묵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가 쓴 글 역시 침묵과 적막이 지배한다.

 

적막을 깨뜨린 이는 이삭이다. 그는 궁금했다. 갖고 가는 짐을 보니 번제를 드리러 가는 게 분명한데 제물이 없으니 말이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물음은 누군가가 물어야 할 당연한 질문이겠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이어 두 번째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들에게 사실을 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숨겨야 할지를 두고 그는 고민했을 거다. 둘 중 어느 편이든 아버지로서 여간 가슴 찢어지는 일이 아니었을 터이고…….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대답이다. 우린 이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 흔히 그렇듯이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의 표현으로 봐야 할까? 일의 결말을 아는 우리에겐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럴까? 왠지 대답을 피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양을 하느님이 손수 마련해준다면 장작과 불씨는? 하느님은 중요한 것만 직접 마련해주고 나머지는 사람이 마련해야 하는 걸까? 아브라함이 앞을 미리 내다보고 한 말은 아닐 게다. 그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앞날을 내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시험할 게 뭐 있겠나.

 

문장을 잘 읽어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어린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줄 거란 문장에서 우리말과 영어는 마련하다’(provide)라는 동사를 쓰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보다’(see)라는 동사를 쓴다. 따라서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하느님이 손수 번제로 바칠 어린양을 보실 것이다가 되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문장이 어색해지니까 영어나 우리말 성경이 보다마련하다로 번역했다고 짐작된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다. 이 문장의 주어는 아브라함이 아닌 하느님인데 아브라함이 어린양을 볼 거라는 오해 말이다. 이 문장의 뜻은, 하느님이 모든 걸 보고 있다고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이다. 이걸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자기가 봤기에 믿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보고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 되겠다.

 

이렇듯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걸 그분에게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뭘 봤거나 알거나 이해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느님이 하는 일이니까 무조건 믿고 맡기는 게 믿음이다. 시편 37편에는 이런 믿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야훼만 의지하고 착한 일을 하여라.

그분의 미쁘심을 간직하고 이 땅에서 살아라.

기쁨은 오직 야훼에게서 찾아라.

야훼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야훼만 의지하여라.

야훼께서 몸소 도와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

잠잠히 야훼를 바라고 야훼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안달하지 말아라.

 

현대인에게 이런 믿음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계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하느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그분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걸 걸고 살진 않는다는 말이다. 너무 많은 걸 갖고 있고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기 때문이다. 많은 걸 갖고 있고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하느님만 바라보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4.

 

이윽고 아브라함 일행이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는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장작을 벌여 놓고서는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하느님이 손수 한 미래의 약속을 이룰 씨앗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거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애원해서 야훼가 마지못해 해준 게 아니다. 야훼가 주도적으로 한 약속이다. 아브라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런데 그 약속을 야훼가 주도해서 무효로 돌리는 게 말이 되나. 사람이 이런 짓을 해도 말이 안 되는데 하느님이야 오죽하겠나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 얘기가 뭘 말하려는가? 야훼 하느님이 말도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이 행동할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를 묻는 얘기가 아닐까? 하느님이 자기가 한 약속을 깨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얘기 아닌가 말이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해보자.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알 수 없는 분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 생각에 갇혀 있지 않아서 하느님이다. 그래서 성서도 하느님은 측량할 수 없는 분이라 하지 않던가(욥기 5:9; 9:10; 시편139:6).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다. 그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알지 못했다. 이렇듯 그는 다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가를 시험받았던 거다. 이와 비슷한 시험을 욥도 받았다. 욥은 자기가 왜 그런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닥친 고난이기에 그는 하느님에게 항의하고 저항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은 죄가 있을 테니 무조건 하느님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빌라는 친구들의 충고는 그에게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을 터이다. 회개도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린 흔히 하느님은 정의롭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성경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우린 하느님이 정의롭기 때문에 믿는가? 하느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믿나? 하느님이 정의롭지 않으면 안 믿을 건가?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을 안 믿겠는가 말이다. 하느님은 정의롭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느님이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닐까? 하느님을 이렇게 저렇게 정의하고 규정하고,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건 믿음에 조건을 붙이는 게 아닐까? 진짜 믿음이 조건 없이믿는 것이라면 하느님에 대해서 조건을 붙이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미래를 약속했고 그걸 지키기 위해 이삭을 태어나게 했다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이미 준 약속과 미래를 취소하겠다고 해도 그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를 이 얘기는 묻는다. 미래를 약속하고 성취한 하느님을 믿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 보장이 있다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겠나. 문제는 그걸 취소하는 하느님도 믿을 수 있는가에 있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바로 이것이었다. 산상수훈 말씀도 같은 뜻이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또는 '제 키를 한 자인들 크게 할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마태복음 6:25-31).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하느님을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조건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믿을 수 있냐는 거다. 하느님이 모순되더라도 믿을 수 있냐는 거다. 그냥 하느님이니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모순되더라도 그분이 하느님이니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여러분은 그럴 수 있나?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