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Mrs. 보디발, 남자에게 들이댄 유일한 여자

by 한종호 2015. 4. 3.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1)

 

Mrs. 보디발, 남자에게 들이댄 유일한 여자

- 잘 읽어보면 제법 짭조름한 요셉 이야기2 -

 

 

1.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남자는 여자를 지배해왔다. 아주 오래 전엔 여자가 남자를 지배했었다지만 그에 대해선 논란이 여전히 있고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도 확실치 않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가 바람직했다는 말도 아니고 그 시절이 좋았단 얘긴 더더욱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왔다는 거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면서 그들을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이나 욕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아왔다. 그 원인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고 문화적 시각으로 풀 수도 있지만 구약성서가 여기 한 몫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적어도 서구세계에서는 그랬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서 자기도 먹고 아담에게도 먹게 했기에 인간세상의 모든 비극이 시작됐다는 얘기 말이다. 이 비극이 여자에게서 비롯됐기에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성폭력은 남자에 의해 여자에게 저질러졌다. 이전 글에서 언급된 경우들이 모두 그랬다. 세겜과 디나가 그랬고 유다와 다말이 그랬으며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암논과 다말 모두가 그랬다. 미수에 그쳤지만 사라 및 리브가가 본인들 의사에 반해서 이방 왕들과 잠자리를 같이 할 뻔한 경우도 마찬가지다(창세기 12, 20, 26장). 남자가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게 가능한 일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유일한 예외가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의 경우다. 그녀는 구약성서에서 남자를 유혹하려고 했던 유일한 여자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 글은 이 사건에 대한 얘기다.

 

요셉이 이집트로 끌려갔다. 요셉을 이집트로 끌고 내려간 이스마엘 사람들은 바로의 신하인 경호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요셉은 그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은 요셉이 눈에 들어서 그를 심복으로 삼고 집안일과 재산을 모두 요셉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안일과 그 모든 재산을 맡겨서 관리하게 한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주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든지 밭에 있는 것이든지 그 주인이 가진 모든 것에 미쳤다. 그래서 그 주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겨서 관리하게 하고 자기의 먹거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을 하며 “나하고 침실로 가요!” 하고 꾀었다. 그러나 요셉은 거절하면서 주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주인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시고는 집안일에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인께서는 가지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셨으므로 이 집안에서는 나의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주인께서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마님입니다. 마님은 주인어른의 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느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이렇게 말하였는데도 주인의 아내는 날마다 끈질기게 요셉에게 요구해 왔다. 요셉은 그 여인과 함께 침실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여인과 함께 있지도 않았다. 하루는 요셉이 할 일이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의 종들이 집 안에 하나도 없었다. 여인이 요셉의 옷을 붙잡고 “나하고 침실로 가요!” 하고 졸랐다. 그러나 요셉은 붙잡힌 자기의 옷을 그의 손에 버려 둔 채 뿌리치고 집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여인은 요셉이 그 옷을 자기의 손에 버려 둔 채 집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집에서 일하는 종들을 불러다가 말하였다. “이것 좀 보아라. 주인이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이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았구나. 그가 나를 욕보이려고 달려들기에 내가 고함을 질렀더니 그는 내가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고 제 옷을 여기에 내버리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이렇게 말하고 그 여인은 그 옷을 곁에 놓고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주인이 돌아오자 그에게 이렇게 일러바쳤다. “당신이 데려다 놓은 저 히브리 사람이 나를 농락하려고 나에게 달려들었어요. 내가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질렀더니 옷을 내 앞에 버려 두고 바깥으로 뛰어나갔어요.” 주인은 자기 아내에게서 “당신의 종이 나에게 이 같은 행패를 부렸어요” 하는 말을 듣고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요셉의 주인은 요셉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창세기 39:1-20).

 

 

 


<"Joseph and Potiphar's Wife" by Guido Reni , Wikimedia Commons. >

 

요셉이 이집트 왕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린 걸 행운이라 봐야 할까? 하긴 개도 정승 집 개가 낫단 말이 있으니까….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지 않나, 꼬챙이는 주머니 속에서도 삐죽 튀어나오는 법, 잘난 사람은 어딜 가도 눈에 띠게 마련인 모양이다. 요셉은 야훼의 돌보심 가운데 승승장구해서 보디발 집의 넘버2가 됐단다.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앞길이 순탄하게 열린다는 사실을 설화자 뿐 아니라 보디발도 알았다고 하니(3절), 이미 이때부터 야훼는 이방인에게도 인정받았던가. 요셉의 형들은 야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을 죽이려다가 한발 물러서서 노예로 팔았는데…. 보디발은 자기 먹거리 외에 모든 집안 살림을 요셉에게 믿고 맡겼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이 ‘먹거리’를 ‘아내’를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으로 보는데 그럴듯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도 이 완곡어법이 사용됐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용모 준수하고 잘난 게 때론 문제를 일으키는 건 예나 제나 마찬가진 모양이다. Mrs. 보디발이 요셉의 준수한 용모를 일찍이 눈여겨본 모양이다. 그가 종으로 팔렸을 때가 열일곱 살이었다고 하니 한창 좋을 때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용모 준수한 청년이 눈에 띤다 해도 여자들은 대개 가슴만 졸일 뿐 쉽게 들이대진 못하는 법인데 Mrs. 보디발은 안 그랬다는 거다. 시대를 앞서간 비범한 여자였다는 데 한 표 던진다.

 

처음엔 일을 쉽게 생각했던가 보다. 요셉에게 눈짓을 하며 “나하고 침실로 가요!”라고 꼬이면 당장 그녀의 침실로 갈 줄 알았겠지. 이게 ‘명령’일까 ‘유혹’일까? 주인의 아내, 그것도 파라오 경호대장의 아내와 넘버2지만 한낱 노예에 불과한 사이였으니 유혹보다는 명령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나중에 보디발이 아내의 거짓말에 속아 요셉을 단박에 감옥에 가둔 걸 보면 요셉의 지위가 얼마나 안정적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설화자는 이 해프닝의 성격을 요셉의 순수함과 지혜가 드러난 사건으로 규정하지만 과연 그가 여자였어도 주인의 명령을 이처럼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요셉은 자기에 대한 주인의 신임과 하느님을 이유로 들면서 Mrs. 보디발의 명령을 거절한다. 그녀의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치근댔다니 요셉이 지나치게 미소년이긴 했나 보다. 아니면 Mrs. 보디발이 자기 명령을 감히 거역한 요셉을 그냥 둘 수 없어 끝까지 해보려 했던지. 하지만 요셉이 누군가, 그는 계속 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설화자가 “요셉은 그 여인과 함께 침실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여인과 함께 있지도 않았다”고 말한 건 요셉의 결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훗날 해석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폈는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자.

 

이쯤 되면 웬만한 여자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포기했으련만 Mrs. 보디발은 안 그랬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하루는 요셉이 일을 처리하러 주인집에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집안에 종들이 하나도 없었단다. 이때 Mrs. 보디발이 나타나서 그의 옷을 붙잡고 “나하고 침실로 가요!”라며 마구 들이댔다. 그때 집안이 비어 있던 건 그녀가 놓은 함정이었던 모양이다. 종들은 덕분에 달콤한 하루 휴가를 즐겼겠지만 요셉은 큰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요셉은 단호히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집밖으로 도망쳤단다. 하지만 그의 옷까지는 탈출에 실패하여 옷은 그녀 손에 잡히고 말았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겠다. 일개 종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창피한 일인데 그와 동침하는 데도 실패했으니 말이다. 이 망신스런 사건을 덮는 길을 요셉에게 강간미수죄를 뒤집어씌우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옷을 흔들며 종들을 불러서 이렇게 외쳤단다(이땐 종들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던 모양이다). “이것 좀 보아라. 주인이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이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았구나. 그가 나를 욕보이려고 달려들기에 내가 고함을 질렀더니 그는 내가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고 제 옷을 여기에 내버리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잠자다 자기 아기를 압사시켜놓고 멀쩡한 남의 아기를 훔쳐 와서 자기 아기라고 우겼던 창녀처럼 Mrs. 보디발은 자기가 요셉을 겁탈하려다 실패하니까 그 죄를 요셉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것이다. 이때 솔로몬 같은 무자비하지만 현명하긴 했던 재판관이 있었더라면 시비를 가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재판관은 거짓말한 여자의 남편이었으니…. 하긴 누군들 이런 경우에 자기 아내 말을 믿지 종의 말을 믿겠는가. 보디발은 아내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요셉을 감옥에 가뒀다.

 

2.

 

창세기를 갖고 강해설교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콕 집어서 이 얘길 주제로 한 설교가 그리 많진 않을 거다. 도덕적으로 보나 신앙적으로 보나 남자가 여자의 성적 유혹을 이긴 게 뭐 대단한 얘기라고 그걸 갖고 설교하겠는가 말이다. 안 그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는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구약성서를 잘 몰라도 이 얘기를 아는 사람은 많다. 왜 그럴까?

 

비슷한 얘기가 흔하기 때문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 “두 형제 이야기”(Tale of Two Brothers)라는 게 있는데 이것이 요셉이야기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 얘기는 기원전 1200-1194년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세티 2세(Seti II) 때 만들어졌다. 이 얘기가 적혀 있는 파피루스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단다. 얘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안푸(Anpu)와 바타(Bata)는 형제로서 형 안푸는 결혼을 했고 동생 바타는 미혼이었는데 하루는 형수가 시동생 바타를 유혹했단다. 요셉처럼 바타가 이를 거부하자 형수는 적반하장 격으로 시동생이 자기를 유혹하려 했다고 남편 안푸에게 거짓말한다. Mrs. 보디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화가 난 안푸가 바타를 죽이려 했고 그냥 죽기가 억울했던 바타는 형에게서 도망치면서 신에게 자기를 살려달라고 빌었단다. 그러자 신은 두 사람 사이에 악어가 득실대는 호수를 만들어 둘 사이를 떼어놓아 바타를 보호해줬다. 바타는 호수 너머에서 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자기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생식기를 잘라서 호수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그걸 먹어버렸다고 한다. 이후로도 얘기는 한참 길게 이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바타가 죽었다가 부활했고 그 후 어찌어찌 해서 바타의 부인이 파라오의 아내가 됐는데 나중엔 바타가 아내와 재결합해서 파라오가 되는 걸로 얘기가 끝난다. 그 얘길 자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겠고, 어쨌든 우리는 요셉 이야기와 비슷한 줄거리가 막장 드라마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옛날에도 흔했다는 점만 확인하면 되겠다.

 

반복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겁탈하는 얘긴 구약성서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궁금한 점은 대체 이 얘기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거다. 이 얘긴 뭘 말하려는 걸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편집자는 이 얘길 요셉 설화 안에 포함시켰을까? 대부분은 남자가 여자를 겁탈하는 얘기이니 균형을 맞추려 했을까? 설마 그럴 리가…. 이 사건이 요셉의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나? 그렇다면 그게 뭘까?

 

이 궁금증을 풀기 전에 요셉 이야기의 문학적 성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해서 무려 아홉 장에 걸쳐서 이어지는 3백절도 더 되는 긴 이야기다. 중간에 요셉과 무관한 얘기들을 빼고도 그렇다. 37장에는 요셉이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얘기와 꿈을 꾼 얘기, 그리고 그 꿈으로 인한 형들의 질투 때문에 이집트에 종으로 팔린 얘기가 적혀 있다. 그런데 38장에는 요셉과 무관한 유다와 다말 얘기가 등장한다. 이 얘긴 앞뒤 맥락과 연결고리 없이 그냥 툭 던져졌다. 그래서 해석자들이 이 얘기의 전후 연관성을 찾아내고 삽입 이유를 밝히려고 골치 깨나 썩었다는 얘긴 이전 글에서 했다. 그런데 39장으로 넘어가면 유다와 다말 얘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다시 요셉 얘기로 돌아온다. 이번에도 아무 연결고리 없이 말이다. 이것만 보면 편집자의 글 다루는 솜씨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렇게 앞뒤 연결고리 없이 툭 던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 다음으로 39장에서 41장까지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승승장구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얘기가 전개되고 42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는 가족이 재회하는 얘기가 이어진다. 여기서 학자들의 흥미를 자극한 점은 39장부터 41장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 요셉의 가족에 대한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셉 이야기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곧 요셉의 가족 이야기와 그가 이집트에서 출세하는 이야기로 구별해야 한다고 봤다. 작은 차이만 발견되면 그걸 복수의 자료가 존재하는 증거로 가정하는 역사비평학의 고질병이다. 얘기의 흐름을 보면 이 대목에서 가족이 등장할 이유가 없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겪는 얘길 하는데 가나안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등장할 이유가 어디 있나 말이다. TV 드라마에서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는데 협찬을 받았다고 PPL(간접) 광고를 억지로 집어넣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도 아닌데 얘기 흐름상 가족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데 억지로 집어넣을 리 없지 않은가. 성서 연구에서 숲 전체를 보지 않고 나무 하나 하나만 세심하게 바라보면서 차이점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건 이젠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얘기에서 보디발이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다. 얘기의 전개상 요셉이 그의 집에 팔려갔으니 그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게 정상인데 예상 외로 그의 역할이 미미해서 오히려 이상하다. 대신 그의 아내가 주인공으로 나서지만 말이다. 학자들, 특히 요셉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또는 믿고 싶은 학자들은 이집트 역사에서 보디발이란 이름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누가 알겠나, 훗날 발굴될 유물, 유적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지…. 이는 “두 형제 이야기”에서 보디발에 해당하는 안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달라지면서 역할이 줄어든 경우라고 할까….

 

3.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요셉 이야기는 두 개의 큰 흐름으로 전개된다. 첫째는 요셉이 꾼 꿈이 성취되는 과정이고, 둘째는 숨어서 일하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성찰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사실 두 흐름은 내용상 하나로 묶을 수도 있다. 요셉이 꾼 꿈도 요셉이 부모와 형들을 지배하게 되는 얘기라기보다는 요셉 덕분에 기근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이집트에 내려가 정착하게 되는 걸 예시하기 때문이다. 곧 요셉의 꿈은 누가 누굴 지배하는 데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느님의 섭리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보여주는 얘기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 흐름에서 요셉과 Mrs. 보디발 사건이 갖는 의미는 뭘까?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하면 이 얘기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 차지하는 분량도 39장 6절에서 20절까지로 적은 편이다. 얘기의 흐름만 놓고 보면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요셉을 감옥에 보내서 거기서 파라오의 술 시종장과 빵 시종장을 만나게 한 게 전부다. Mrs. 보디발의 욕정 덕분에 승승장구하던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해석자들은 여기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냈다. 아무래도 시종장들을 만나게 한 연결고리 역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보다. 그들은 권력자 아내의 끈질긴 명령/유혹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조를 지켰던 요셉에게서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를 봤다. 요셉이야말로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인 성적 욕망을 극복하고 도덕적, 신앙적으로 정절을 지킨 위인이라는 얘기다. 틀린 말은 아니다. 더욱이 요즘같이 목회자들이 드물지 않게 성 스캔들을 일으키는 상황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의미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그토록 높이 추앙해마지 않을 미덕인가? 욕정에 빠진 여자의 유혹을 물리친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나? 요셉 말고는 이런 유혹을 이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서글픈 마음이 든다. 요셉 외엔 이런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고대 해석자들이 요셉의 미덕을 부각시키려고 사용한 논리를 보면 개중엔 그럴듯한 것도 있지만 터무니없는 것도 많다. 그들은 이 작은 에피소드를 요셉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양 보았다.

 

 Mrs. 보디발의 유혹(고대 해석자들은 대체로 Mrs. 보디발의 행위를 ‘명령’이 아닌 ‘유혹’으로 봤다. 둘 사이의 권력관계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을 물리친 힘을 계명에 대한 요셉의 충성심에서 나왔고 그것이 그의 위대한 덕목이 됐으며 그 덕분에 그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카비1서 2장 53절은 “요셉은 곤경에 빠졌어도 계명[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기에 이집트의 주인이 됐고…(Joseph in the time of distress kept a commandment, and became lord of Egypt…)”라고 적고 있고, 마카비4서 2장 2-4절은 “온순한 요셉이 칭찬받은 이유는 그가 정신적 노력을 통해서 성적인 욕구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가 젊고 활기 넘쳤을 때도 이성으로써 자기의 왕성한 혈기를 자제했다. 이성은 불같이 타오르는 성욕뿐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욕구까지도 잘 다스릴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It is for this reason, certainly, that the temperate Joseph is praised, because by mental effort he overcame sexual desire. For when he was young and in his prime, by his reason he nullified the frenzy of his passions. Not only is reason proved to rule over the frenzied urge of sexual desire, but also over every desire)”라고 말한다. 이 문서들은 요셉이 계명에 충실했고 이성으로 욕정을 극복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Mrs. 보디발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요셉이 얼마나 단정하고 단호했는지 강조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엔 Mrs. 보디발이 ‘날마다’ 요셉을 유혹했다고 말하는 창세기의 보도는 2% 부족했다. 그래서 희년서 39장 8-9절은 그녀가 무려 1년 동안 요셉에게 매달리고 간청했지만 그가 말을 안 들었다고 썼다. 그녀는 “요셉을 껴안고 매달려서 함께 동침하려 했으며” 심지어 “집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에게 매달렸다”는 거다. 하지만 요셉이 누군가, 그는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문을 부수고 밖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껴안고 매달렸다든가 걸어 잠근 문을 부수고 도망쳤다는 얘기는 창세기엔 없다. 해석자들은 요셉의 강직함을 강조하기 위해선 그 정도의 과장은 해도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인용해보자. <열두 족장의 유언 The Testament of the Twelve Patriarchs> 가운데 ‘요셉의 유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여기서 화자는 요셉 자신이다. “그 이집트 여인이 얼마나 나를 자주 죽이겠다고 위협했는가! 그녀는 얼마나 자주 나를 벌했고 나를 불러서 협박했던가! 내가 그녀와 동침하는 걸 거부했을 때 그녀는 ‘내 말대로만 하면 너는 나의 주인이 될 것이며 내 집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내가 감옥에 갇힌 후에도] 그녀는 내게 사람을 보내서 ‘내 욕구를 채워주겠다고 동의하면 너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흑암에서 구해주겠다.’ 나는 마음으로조차 그녀를 범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나를 그녀의 유혹에서 보호해주셨다.”

 

고대 해석자들의 해석에서 눈이 띠는 점은, 그들은 각각 자기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요셉의 삶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격히 말하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요셉 이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요셉이 이 계명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유혹을 이겨냈다는 말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마카비1서 저자도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그 정도 시대착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거다.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계명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착오쯤은 해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카비4서의 저자는 요셉이 ‘이성’(reason)으로 ‘욕구’(desire)를 극복했다고 해석한다. 명백하게 그리스 철학의 세례를 받은 표현이다. 요셉이 계명에 대해 충실했으므로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는 마카비1서와 ‘이성’의 힘으로 유혹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마카비4서 사이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요셉의 유언’ 저자(그는 요셉이 아니다!)는 ‘마음으로 하는 간음’을 언급한다. 그는 간음을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역시 구약성서에선 볼 수 없는 새로운 생각이다. 예수께서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으므로(마태복음 5:27-8)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말이다.

 

4.

 

구약성서 지혜문학의 대표 격인 잠언이 칭찬하는 바로 이 사람이 요셉이 아닐까? “지혜가 너를 음란한 여자에게서 건져 주고 너를 꾀는 부정한 여자에게서 건져 줄 것이다. 그 여자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고 하느님과 맺은 언약을 잊은 여자이다. 그 여자의 집은 죽음에 이르는 길목이요 그 길은 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런 여자에게 가는 자는 아무도 되돌아오지 못하고 다시는 생명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잠언 2:16-19). 이외에도 잠언은 열심히 일하며 술 취하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곧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Mrs, 보디발은 지혜의 인물 요셉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진실하지 않았고 음란했으며 이중적이었고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뭐든 하려 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요셉이 지혜의 모범이었다면 그녀는 그 반대였던 거다.

 

이 얘기가 역사적 사실이냐 픽션이냐를 두고 학자들 간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은 지금은 별 의미가 없다. 역사적 사실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기엔 작위적인 면이 없지 않다. 지혜문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인물에 너무도 잘 들어맞는 것도 역사성을 의심할 여지를 준다. 지금은 사실이냐 픽션이냐의 싸움이 뜨겁지 않은데 그 까닭은 한편이 다른 편을 설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싸워봐야 결론이 나지 않을 걸 양편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점은 얘기의 역사성 여부 보다는 이 사건이 어떤 문화적, 지적, 그리고 종교적 상황 속에서 유통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일 터이다.

 

폰 라트(von Rad)는 자기가 이스라엘의 ‘지적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렀던 솔로몬 시대가 이 얘기의 배경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주장을 계승한 월터 브뤼그만(Walter Brueggemann)이 In Man We Trust (우리말 번역은 《지혜전승 연구》)에서 이 얘기를 상세히 분석한 걸로 기억한다. 솔로몬이 성적으로 매우 방탕했기에 ‘바른생활 사나이’ 요셉을 예로 들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기껏 왕 한 사람을 경고하는데 사용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그 옛날에 글이란 것은 소수의 글 읽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존재했고 그들은 주로 궁중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대 해석자들은 대개가 솔로몬보다 1천년 가까이 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솔로몬 시대에 유통됐던 이야기를 되살려내 거기에 성적 유혹에 대한 결연한 저항 코드를 집어넣어 새롭게 해석했을 땐 그들 시대에 그게 필요했기 때문이겠다. 왜 그들에겐 이런 요셉이 필요했을까? 성적 유혹에 결연히 대결하는 요셉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누구도 이 질문에 확신을 갖고 대답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만으로는 그 시대의 어떤 면이 그런 요셉을 필요로 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상당한 정도의 개연성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점은, 그들의 시대에는 ‘지혜의 화신’이 필요했는데 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요셉이 거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선택된 까닭은 권력자 아내의 성적 유혹을 결연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가면서까지 Mrs. 보디발의 유혹을 성공적으로 물리침으로써 모범적인 지혜의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줬다는 말이다.

 

다음 글에선 요셉 이야기가 ‘지혜’라는 걸 어떻게 묘사하는지, 감춰진 하느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그게 감춰졌다고 말하는지를 살펴보겠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