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7)

 

죽음에 이르는 병

-속이지 말라, 그러면 속지 않는다. (L. H. 톨스토이)-

 

 

1.

 

나는 자주 나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타인의 죽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분명 살아있으나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아직 거기에 이르지 않은 나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어디 죽음뿐일까. 추체험이라는 것.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이유는 입장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살면서 죽음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말로써 현실에 몰두해 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현실이 더 이상 죽음을 잊게 해주는 수면제가 아니라 극명하게 죽음을 일깨워주는 각성제로 변할 것이다. 최후에 다다른 나에겐 더 이상 그 어떤 가짜위로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아내와 딸들조차도 《이반일리이치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의 가족들처럼 나의 살아있음을 괴로워하겠지?(그러나 애비는 물려줄 것이 얼마 없단다!)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1910)와 같이 고백하자면 ‘나의 생은 끝났고 오래전부터 나의 생은 멈춰졌다.’ 나는 오로지 온갖 죽음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로부터 나의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공자(孔子, BC 551~479년)는 죽음에 대해 생각지 않았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모른다고 한 것이지 생각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문답의 결론인즉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그 자세가 진정 아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는 것만을 생각하고 모르는 것은 생각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없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그대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께서는 그런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자기죽음을 외면한 채 만용을 부리는 태도는 도리어 공자도 모른다고 한 것을 자기가 안다고 하는 것이 돼버린다.

 

나는 흔하게 ‘죽으면 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죽는 것이 말처럼 쉽진 않았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죽음이 모기 한방 물리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 초인적으로 버티어 가거나, 아예 직면하지 않기 위해 혼수상태에 들어가거나, 이도 저도 망각한 사이비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상태로 퇴행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기독교 역사에 빛을 남긴 인물들 가운데서도 임종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믿음을 어처구니없게 부정해버린 경우들도 많다. 그러고 보면 전인미답의 영역인 그 현실은 생전의 신앙이나 신념이나 인격과는 완벽히 무관한 건지도 모른다.

 

니체나 샤르트르나 또 무신론자인 누가 불신앙으로 신에 대적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했다며 반협박조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이쯤 되면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같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삶에 당당히 열중하던 사람이 자살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자기의 전 인생을 취소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죽으면 끝’이라는 신념을 단칼에 실천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두 경우 모두 죽음에 직면한 삶이란 결코 가볍지도 않고 무거운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환기시켜 줄 뿐이다.

 

2.

 

과거에는 의료적인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했겠지만 임종을 비교적 명징하게 맞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대에는 대부분 혼수상태 속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렇더라도 죽음의 문제는 이 지상에 주어진 나의 생의 수많은 고뇌들 가운데 마지막 고뇌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공자님은 죽음 따위는 말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여전히 죽음의 위엄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심지어 어제까지 동류였던 한 사람의 부음 앞에서 합력해 그를 죽음에 몰아넣고도 ‘나는 계속 살아가야겠다’고 비루한 기염을 토한다. 겸손을 가장한 관용적인 조사와 함께 그러나 ‘나는 그를 잘 모른다’는 끝끝내 비열하고 배덕한 모습이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다시 나의 죽음 이후를 상상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게 될 지 없게 될지 모르겠지만.

 

옛날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임한 인터뷰에서 그 말을 썼다. ‘저승이 있는 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곧 갈테니 함께 이 나라의 민주회복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자는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 이게 공자님이 말씀한 죽음을 모르는 삶에 관한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하늘의 재판(?)’이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구든 뭐라고 불리든 혹은 불렀든,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의 재판관(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이 우주 질서의 창조주임에 분명하다. 그는 지금 나에게 이러한 생과 고통을 허락한 존재이므로 나를 기소한 검사 역시 그다. 그러면 그때 누가 나를 위하여 그에게 변호해 줄 것인가?

 

변호인이란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사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손해를 배상해주도록 변호해주는 자이다. 누가 누구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것인가? 창조주가 피조물인 나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사실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닌 인생 아닌가. 나를 놀리듯이 주고는 빼앗아 간 것도 그다. 곧 재판관이 피고에게 해를 끼친 것이다. 따라서 변호사는 재판관이 피고에게 그 손해를 배상하도록 청구해야 한다. 말하자면 재판관 자신이 변호인이 되어 피고인 나를 위하여 자신에게 배상을 청구해야한다. 또한 자신이 그 배상을 이행해야한다. 나는 이걸 신적(초월적) 사랑이고 용서이고 화해의 근거라고 믿는다.

 

 

 

3.

 

오늘날 무수한 인간들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고난과 고통과 가난과 질병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그 가운데 조금 살만한 인간들은 말한다. ‘그들은 마땅히 그럴만한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팔자다.’ 인정을 못 받건, 왕따를 당하건, 가난하건, 쫓겨나건, 죽임을 당하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그렇게 배우고 가르쳐왔다. 우리의 영원한 종교는 연기의 법칙에 의한 팔자소관이다.

 

칼 맑스(Marx, Karl Heinrich, 1818~1883)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지만 원래 그 언술의 일부 진의 가운데는 ‘오직 종교만이 민중에게 아편을 준다’는 뜻이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아무렴 맑스 같은 사람이 단지 현대의 안티 기독교도들처럼 오로지 악의만을 가지고 그런 말을 지껄이지는 않았을 테지’하고 무릎을 쳤었다. 아편의 용도는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다 있다. 효능 또한 탁월하다. 결국, 진짜 위기의 순간에 진짜 위기를 맞은 사람은 자신이 받을 것을 받게 될 뿐이다. 이것이 ‘아편의 법칙’이다. 믿음이란 그동안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통행증 같은 것이었고 이제는 그것까지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흔히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의 형벌을 받고 있으니 죄인이고 형벌은 당연하다는 보다 고상한 신학으로 발전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는 것일까? 믿음에 의해 믿음을 상실하게 되는 논리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모면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의 처지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더욱 큰 생에 대한 신뢰와 용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인가? 만일 위기의 순간에 더욱 활발해지는 역설적 힘과 신뢰를 가질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우선 죄인에게 형벌이 내린다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용서로도 부족하다. 용서라는 말 속에 이미 죄와 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중대한 죄행의 결과로 오는 형벌이라면 용서가 해당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곧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에는 반드시 숨겨진 의미가 들어있다는 바로 그 의미에 대한 신뢰가 아니면 안 되겠다. 반드시 고통을 통하여 얻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뢰가 있다면 극단적인 상황을 포함한 삶의 모든 순간은 숨겨진 의미가 있고 삶은 또한 그것을 찾아내려는 과정이 된다. 아무리 절망의 극단에 몰렸어도 생명이 있는 한 반드시 살아갈 의무와 이유와 용기와 능력이 있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한번 죽어 심판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또 거기 이르러서도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게 중요해 진다. 나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의미’이다.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있다면 인생이 공허하다는 그것이 지시하는 하나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의미가 없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끝나고 있고 곧 끝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의미없음, 곧 공허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인생의 수고이고 고생이고 고통이고 고난이다. 그러한 깨우침 속에서만 인생은 비로소 새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인생이 의미가 있어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4.

 

우리는 확실히 두 가지 신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다. 하나는 재판관과 경찰과 간수와 훈육주임으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는 중재자요 변호자요 해방자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이다. 모든 고통과 고난 속에 사는 자는 후자의 신적 활동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종교에 속해있던 무슨 일을 하던 어떤 말을 하던, 이 희망을 가로막는 자들은 항상 첫 번째 사상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죽기를 부추기는 자들이다. 누가 이 점을 바로 깨닫고 만연된 재판관으로서의 사상을 거슬러 억울한 피고를 위해 소송을 걸어줄 것인가? 바로 그 재판관 이외에 누가 그러한 소송을 담당해 줄 수 있을까? 만일 재판관이 재판관 자신을 거슬러 피고를 위해 소송을 걸어주는 재판관이라면 그 재판관은 어떤 재판관일까? 재판관에 대한 이 엄청난 오해는 곧 풀릴 것이다.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의 출세작 <터미네이터>는 미래의 메시야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자기의 아버지를 현세에 보내서 어머니(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지킨다는 기본 플롯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이야기의 패러디이다. 인간의 모든 죽음과 고난 속에는 이러한 염원을 가능케 하는 원형적 요소가 본래적으로 있다는 증거의 한 사례가 아닐까?

 

물론 표면적으로 증거를 얻어낼 수는 없다. 가령 ‘나는 오늘밤 죽어도 반드시 천국 갈 거야. 믿기 때문에’라고 말할 때, 믿음이라는 면죄부를 하나님이 직접 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는 즉시 그 사람은 죽어야 할 것이다. 면죄부란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면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기 면죄부 판매의 희극성의 백미란 면죄부를 받고도 살아간 사람들의 자기모순에 있다. 내 생각엔 미래의 죄를 위한 면죄부란 도무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면적 증거가 없어도 신뢰는 해야 한다. 그러나 담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재판관과 경찰과 간수의 사상은 마치 자기들이 그 담보를 줄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것은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의 주장은 보증이 될 수 없다. 나는 감히 그런 주장을 못하겠다. 그들은 때가 이르면 친구도 팔고 동류도 희생시킬 것이다. 왜? 그들은 자기의 죽음은 끝까지 인정치 않고 남이야 죽던 말던 오로지 자기의 삶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에 그들은 눈을 감고 있다. 그 덕에 자기들이 보유한 돈과 권력이 아직은 강철 같은 보장이라 굳게 믿고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와 같이 동일한 죽음에 처하게 됨으로써 그들이 섬겨온 신조차 자기들을 인정하지 않음이 드러날 것이다. 나름 유구한 역사를 가진 현란한 지혜의 논리를 구사했던 욥의 친구들처럼. 아편의 부작용이 조금 늦게 나타났을 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이익과 몫을 위하여 그 자신이 재판관과 경찰과 간수가 되어 동료인간들을 끝없이 고발하고 재판에 넘기는 자들은 그의 자식들의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무지하고 악한 행위는 마땅히 그에 대한 보응을 받아야한다. 육체적인 그러나 더 크게는 정신적인 의미의 그의 자손들은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들 역시 분별력을 상실하였으므로 이 진실이 진실에서 그들을 소외시킬 것이다. 그들도 역시 자기 조상들과 같이 꼴통스런 주장을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5.

 

어느 사이 내 눈빛은 세상의 이런저런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흐려졌다. 나의 몸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같아서 몸과 정신이 일체가 된 건강했을 때의 현실감각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일생을 재판관으로 경찰로 간수로 지내온 자들이 나처럼 자기에 대해 스스로 놀라고 두려워하는 꼴을 본다. 스스로 강철 보장을 가지고 살아온 자들이 도대체 왜 놀라는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의 믿음의 배반에 놀래서 죽는다! 놀란다는 것은 자기들 안에도 나와 같은 죄라면 죄이고 고뇌라면 고뇌가 있었다는 것일 텐 데, 또 입 밖으로는 자기는 돈이 있으니까, 권력이 있으니까, 이것들이 나를 구원해 줄 테니까, 아무런 고뇌도 없는 양 의연한 체 큰소리를 친다. 속으로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저 역시 놀라고 무서워하면서도 죽음에 기겁하는 나를 보고 경박하다고 비난을 한다. 세월호처럼 무수한 어린 생명들이 무고하게 죽임당한 그 죽음 앞에서도 손익계산에 따른 잔인하고 비정한 말들을 물마시듯 한다. 그래라. 스스로 고매한 의인이 되어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순결하다고 여기면서 스스로 강해지거라. 당신들은 유난히 강한척하는 존경에 목이 마른 모양이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강함에 바치는 존경도 비굴한 아첨으로만 보인다.

 

나에겐 도무지 그런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진실한 존경은 언제나 숨겨져 있다. 번지르르하게 얼굴에 대고 표현되는 게 아니다. 사실상 내가 옛날처럼 철모르고 마냥 삶을 삶이거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이미 다 지나가 버렸다. 나는 이제 어떤 계획이나 희망도 가질 수가 없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밤을 낮이라 하거나 빛이 어둠과 가까우니 어둠도 빛이라 하는 자들로 가득하다. 내가 아는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확실히 우리보다 먼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5).

 

그러니 내가 희망을 둘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희망을 두어야할 곳을 아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우리 모두 죽은 자들의 장소에 내려갈 때는 우리의 희망 역시 우리와 함께 ‘쉬올’의 문에 이르게 될 것이 아닌가.

 

한 인간의 절망은 모든 인간의 절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사는 것은 또 생각지 아니하고 마냥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종교로 삶을 대신한다.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삶이 무서워 죽음으로 도피한 것인가? 도무지 어리석고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도진개진 그걸 비웃고 욕한다 해도 마찬가지겠지? 우리 모두 살아가는 이 세상은 무엇인가? 천국은 아니다. 지옥도 아니다.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천국을 꿈꾸게 되고,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지옥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지금 말로는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고, 입으로는 중재자와 변호사와 해방자의 말을 하지만 삶으로는 재판관과 경찰과 간수에게 아첨하는 자들의 천지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자기들조차 알지 못하니까. 그러나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다는 말만은 해서는 안 되겠다.

 

정직히 말하자. 지금 대한민국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온 나라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다. 그런데도 이 광범위한 절망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오로지 권력의 용역이 된 경찰력의 비호아래 국가가 저지르고 있는 가증스런 폭력은 무얼 말해주는가? 죽음으로도 깨닫지 못하는 삶이란 또 무엇을 위한 것이겠는가? 지금 국가 전체가 우리들 스스로의 직관과 이성을 철저히 배반하고 그에 반하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그것을 믿거라 더욱 담대해진 권력자들은 더욱 더 가증스런 속임을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용서하실지라도 가증스러운 것은 용서치 않는다. 누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그 부도덕은 스스로 심판에 이른다. ‘사람은 한번 죽는다’는 말. “속이지 말라, 그러면 속지 않는다(Не обманывайтесь, то не будет обманываться)!”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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