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8)
삼층천(三層天)
-백 년 동안의 착각-
1.
흔히 ‘66권의 성경’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방대한 분량이긴 하다. 그러나 선입견 탓인지 낱낱권의 중량감을 한 권의 책이라 쳐주기엔 모자란다는 느낌도 있다. 그냥 ‘66건의 문서로 이루어진 히브리 성서’라든가, ‘유대인에게 전승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순 여섯 개의 기록물’이라고 했으면 어떨까? 불경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정확하지 않고 과장된 표현이 오히려 저작의 진정한 의미를 지나쳐 버림을 경계하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신약성서 27권’이라 칭할 때는 과장의 느낌이 좀 더 강해져 민망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 신약에는 현대적 관점에서 한 권의 책이라 칭할 만한 분량을 가진 문건이 없다. 내용의 중대함은 둘째 치고 분량상 소책자 정도에도 못 미치는 문서들이다. 그 27권 중 13편이 사도바울의 편지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당대적 현실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무엇보다 그 소박함 가운데서 복음의 위대함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서는 말하자면 학자나 사상가의 홀로된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다. 편지들의 모음이다. 냉정히 규정해 네 개의 「복음서」 역시 회람을 목적으로 쓰인 편지들이다. 편지라는 형식은 그 내용이 발신자와 수신자가 놓인 현실과 관련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령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학술 사상적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설령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을지라도 다만 그것에 관한 사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색하는 당사자들의 현실에 더 밀접히 관계돼 있다.
교회 다니는 문제, 교회 안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미워하는 문제, 인격적인 미성숙함,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태도들, 불미스러운 스캔들, 파벌, 몰이해, 무식함, 잘못된 열심….
그런 지극히 인간적이거나 인간적이지 못한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 지금 이토록 중차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떠맡고 있다는 것. 이게 그들의 사명이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말하고 전파하고 이끌고 나가는 유일한 존재들이라는 것. 그러니 여기엔 항상 두 가지 사항이 고려된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고상한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맡은 소명을 받은 성도들의 연약함.
말하자면 당신들이 이 기독교의 전부라는 것을 기억시키려 한다. 전부이니까 전부라는 중대함에 대한 자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그럴 테지만 편지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실상을 생각해보면 견적이 안 나올 것이다. 차라리 전문 연구로 한 권의 책을 헌정하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혹은 한 권의 책의 분량에 달할 정도의 디테일한 편지를 썼어도 좋았을 것이다. 짧은 편지가 얼마나 자주 왜곡되고 곡해되고 과장되고 또 다른 목적에 의해서 인용되는지에 관해서라면 이 소박한 편지들과 그 편지를 해설하는 오늘의 교회강단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험으로 보건대 사실은 나 자신이 항상 먼저 문제가 된다. 그러나 때론 진짜 명색이 충성된 교회의 일꾼의 입장으로서 나보다 주님이 걱정되기도 한다. 맡길 만한 사람들에게 맡길 것을 맡기셨어야지, 골라도 어쩌면 이렇게 엉뚱하고 생뚱맞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을 고르신 것인지,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당신들 가운데 진짜 뭘 좀 내세울만한 사람이 있느냐 묻기도 한다(고린도전서 1장). 물론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를 위한 방식이라고 불렀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무식이 우리의 명예라는 말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무식함은 정말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들은 사도바울처럼 무식을 하나님의 지혜로서 겸손히 높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식한 사람이 유식하여 모르는 게 없는 듯하다. 그것은 흡사 무식이 진짜 명예가 돼버린 민망함과 같다.
우리 시골에 이런 특이한 사람이 하나 있다. 그는 일생을 농사에만 매달려 그야말로 소처럼 죽도록 일만 해온 사람이다. 겉모양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 빙충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의 아내가 재산을 자기소유로 다 돌려놓고 곁에는 아예 오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까지도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웬일인지 무슨 신명에라도 잡힌 사람처럼 저돌적이고 씩씩하기만 하다. 이런 이상한 활기와 함께 또 다른 이색적인 징후가 발견된 것은 최근 몇 년이다. 구체적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부턴가 그가 갑자기 대단히 유식해진 것이다. 모르는 게 없다. 자연 말이 많아졌고 유창해졌다. 그는 바로 자신의 유식함에 사로잡힌 것이다.
누구든 한번 길에서라도 그에게 붙들리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식자연에 어찌할 줄 모른다. 물론 동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경멸한다. 듣기 싫으니 그만 좀 하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 역시 가끔 길에서 그에게 걸려 곤혹스럽게 붙들려 있곤 했다. 그럴 때 줄줄이 사탕으로 그가 내놓는 이야기들은 내가 이미 초등학교시절에 습득했을 법한 지식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순진한 양 같은 학생이 목사라거나 외국유학까지 갔다 왔다는 사실 따위는 인정치 않는다. 바보처럼 묵묵히 소처럼 지독하게 일만해온 사람. 아마도 다른 누가 아닌 나도 그를 무식한 바보나 소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그 바보와 소가 선생이 되어 이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연설을 하는 것이다. 들어줄 수도 없고 아니 들어줄 수도 없이 곤혹스러운 일이다.
2.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내가 경험했던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는데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었습니다.(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실 겁니다.)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실 겁니다.)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들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고 싶으나 나를 위해서는 오히려 약한 것들만을 자랑하려 합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말함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 정도만 하려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으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니 오히려 그것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어리석은 자처럼 되었으나 그것은 당신들이 억지로 그렇게 만든 것이니 내가 당신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나의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당신들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고린도후서 12:1-12).
바울은 14년 전에 한 경험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무슨 이 세상에서 사라져 천국에 올라갔다 왔다거나, 이단자로 분류되는 어떤 인물들이 말하듯 자기도 삼층천(三層天)에 가서 옛날 죽은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다는 헛소리는 아니었다. 요컨대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이유도 중요하다. 그 이유에 경험에 관한 해석 곧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어떤 정신 나간 분파들은 심지어 지옥에서 녹음해온 소리라는 것을 들려주는 간증집회를 한다. 거기 보면 어느 자살한 여배우와 대통령과 심지어 교황에 부처님까지 지옥에서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을 당하며 간절히 부탁하기를 ‘제발 예수 잘 믿고 이런 데 오지 말라’고 하더라는 레퍼토리도 있다. 거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수준의 막장 판타지라고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막장이 아무런 신학적 토대 없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름지기 <슬픈 열대> 같은 책에 기록된 사례들처럼 동시대의 최첨단 속에서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원시와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 얼굴과 몸에 천형과도 같은 슬픈 문양을 새긴 주술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어찌 또 이단이라 손가락질 받는 곳에서 아무런 연고 없이 나타난 현상일 것인가.
바울은 한 번의 확실한 어떤 경험을 함으로써 그의 의식상의 차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고 쓴다. 그는 그것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했다. 이 셋째라고 할 때는 이미 첫째와 둘째가 전제된다. 이 첫째와 둘째 하늘에 대해서도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들어본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라는 표현 역시 공중의 하늘을 말하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하늘은 곧 구원의 세계를 말한다. 그것을 하늘로 인식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의 세상을 말한다.
설명해 보자면 첫째 구원은 과거 율법의 세계였다. 따라서 둘째 구원은 현재 복음의 세계가 된다. 이것들은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이다. 셋째 하늘, 곧 셋째 구원이란 이러한 구원의 미래적 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연이어 그 사유의 진전과 궤적을 생각한다면 과거의 첫째 하늘은 현재의 둘째 하늘을 그 속에 품고 갈망하였던 것이고, 현재의 둘째 하늘은 과거의 첫째 하늘에서 벗어남과 미래의 셋째 하늘을 품고 지향하게 된다. 이 각각의 구원의 세계는 인간의 인식상의 차원을 달라지게 해줌으로써 이 세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푸르면 여름이 온 줄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 13:28).
때가 차 그 날이 도래하면 그때는 누가 들어가지 말래도 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셋째 하늘이란 이러한 구원의 결국, 즉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과 탄식을 끝내는 궁극의 세계를 이른다. 사도 바울 자신이 14년 전에 그러한 세계를 이미 경험해보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몸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몸과 분리되는 경험을 했다. 인식의 차원이 달라진 경험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을 누구에게나 권하려하지는 않는다. 그것으로 간증을 하는 것도 아니다. 권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무식한 사람이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다가는 (지금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폐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곧 구원에 관한 곡해와 현실 실종의 신앙 행태가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그 경험을 통해 도리어 이 현실을 환기 시킨다. 이러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은 몸의 가시(몸에 나타난 질병, 그가 곱사등이라는 설과 눈병이 심했다는 설, 그리고 간질설 등이 거론되지만 정확히 어떤 병이었을지는 알 수 없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가시를 괴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한다. 왜냐하면 이 약함을 통해 내가 강하기 때문이고, 이와 같이 모든 약함에 대해 한결같은 강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바울이 단지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도 그것을 참고 견디면서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다는 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고행이나 고통을 당하면서 오히려 신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마조히즘적인 신앙을 말하려는 게 아닐 터이다.
피학적인 신앙이란 그 자신의 특수한 히스토리를 통하여 획득된 정신상의 비틀림과 뒤틀림을 다시 제대로 숙성해 보지도 못한 성도들에게 세뇌시켜서 마침내 그들의 정신을 치료가 되지 않는 불구로 만들어 놓게 되는 신앙상의 폐해라 할 수 있다. 한번 이런 식의 신앙에 물든 사람은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 크게 유쾌케 되는 진리의 쾌활함을 얻게 될 리가 없다. 음울하고 자기 비하적이며 공포적이고 괴기스럽고 율법적이며 변질된 도덕,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욕 같은 것들이 거기에 개입된다. 결국 하느님이 과연 그러한 세계를 원하신 것인지 그것이 장차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비현실 사이비(似而非)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말처럼 그들의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불쌍하고 불행한 정신의 이면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 환희와 열의가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그들은 더 위태롭다.
바울의 약할 때 오히려 강하게 됨으로 감사하다는 고백은 매를 맞으면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피학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다. 바울은 몸을 떠난 경험을 했고 그것은 그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졌으나 의식을 뛰어넘는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경험이었다. 거기에 이르자 거기에는 죽음도 고통도 우리가 항상 사로잡혀 떨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에고도 그 무엇도 없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낙원의 세계였고 낙원의 말이었다. 감히 해석하거나 상상하거나 자세히 풀어 말할 순 없으나 적어도 무속이나 주술처럼 이상하고 신비롭고 황량한 정신 나간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곧 그것은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모든 영성이라는 경애와 정성의 최고의 경지이며 존재의 모든 고통하고 탄식하는 상태에 대한 해답이 될 구원의 비밀이 거기에 들어있는 그런 것이었을 터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자기는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그것을 더 사모한다고 말했다(고린도후서 5:8). 곧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현실을 뛰어넘었고 또한 동시에 현실을 비약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에게는 여전히 약한 것 투성이였고 그것은 말 그대로 약함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그런 것들에 하나도 구애됨이 없게 됐다. 그에게 현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가 마치 세계의 전부인양 돼버린 그 상태 속에서 그는 그것을 뛰어넘었고 그것을 비약하여 염세주의가 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현실권력에 대한 인정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고 복종이나 굴종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들은 하늘이 아니다. 구원의 축에도 못 든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분명한 연약함 들이다. 곧 제한 받으면서 구애됨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궁핍과 부요와 그 무엇일지라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쓸 수 있는 것이다(빌립보서 4:12).
3.
오늘날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바울과 같은 현실에 겸손하고 현실에 투철하여 현실에 복무하는 소박함과 진실성을 찾기가 어렵다. 교회들은 자꾸만 삼층천(三層天) 으로 올라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땅에다 자꾸만 대형건축을 세우는 이유를 또 알 수가 없다. 천국과 부동산은 어떤 관계일지, 그 간극을 이어주는 영성, 곧 일체의 비결을 획득한 영적 관록의 추구가 보이질 않는다. 이미 천국을 얻은 자이되 현실에서 싸우는 자로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이면서 땅에 현실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오래 참음이라는 가난한 정신의 덕성이 느껴지질 않는다. 궁상맞거나 구질구질하거나 알랑거리거나 뺀질거리거나 위선적이기만 하다. 가장 소박해야할 교회가 얄미운 인간들의 집합소로 변질되어 간다.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몇 과장된 말쟁이 목사들의 문제가 아니다. 구원의 빛 자체의 문제다. 무엇을 위하여 어디를 향하여 간다는 것인지 자기들도 모르니 그래가지고서야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비록 삼층천을 갔다 왔다 하더라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영성은 사이비일 것이다. 하물며 말들은 백년이나 묵어서 광휘로운 종교적 언사를 사용할지라도 결국 약삭빠른 현실을 추구하거나 방어하는데 몰두한 신앙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거기에 참여 하지 않는다 해도 손해 볼 일 없겠다. 문제는 ‘어디로 왜 무엇을 위하여’이고 그 과학적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루뭉수리 신비주의이거나 혹세무민의 사기에 불과하다. 또한 그 대답은 우리의 가장 사소하고 소박한 일상으로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의 인식상의 변화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도무지 천국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지상나라의 뭣부터 뜯어 고쳐야 할까? 사람들이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리어 고통을 주고 괴롭히면서까지 지키려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천국일까? 삼층천을 마치 설화에 나오는 도화낙원(桃花樂園)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어서 정신을 차려야한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고 했다. 우리의 현실이 도화낙원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도화낙원은 없는 것이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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