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19)
애국가에서 ‘묵도송’으로
단지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종북’으로 몰리는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황당하겠지만, 제게는 한 때 애국가를 근사하게 지휘해 보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을 처음 들으며, 그러니까 바이올린 파트가 한 옥타브 높은 피아니시모로 연주하는 애국가 세 번째 연을 들으며 넋이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제겐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좋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서 애국가를 근사하게 연주해보는 꿈 말입니다.
춘천 강원고등학교 시절에 언감생심 콘닥터를 저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첫째 조건이 큰 키였는데 제 키는 밴드부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2학년 말에 서울로 전학했는데 어쩌다 보니 콘닥터가 되었습니다. 친구들 입장에서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셈이 되어버렸고, 전학 온 제 입장에서는 횡재였습니다.
당시는 월남 패망의 여파 때문에 궐기대회가 많아 밴드부가 바빴습니다. 게다가 저는 차범근, 김강남, 박항서 등을 배출한 축구 명문으로 전학을 했기 때문에 동대문 서울운동장 응원 행사에 자주 동원됐습니다. 서울 지리와 교통 법규를 잘 모르는 촌놈이 콘닥터로 앞장을 서다보니 대로에서 밴드부가 갈팡질팡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가끔 연출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하고 있던 시절에는 크고 작은 콘서트가 모두 애국가를 연주해야 시작되었습니다. 관객은 연주자들이 애써 준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애국가 연주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가끔은 녹음된 애국가가 라이브 연주를 대신했습니다. 그런 시대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밴드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마스터해야 할 곡이 애국가와 교가였습니다.
교회 성가 연습이나 밴드부 합주 때 제일 안 되는 것이 피아니시모였습니다. 실력이 없는 놈들은 피아니시모뿐 아니라 포르티시모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때 우리의 관심은 단 하나, 피아니시모를 잘 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내는 가장 작은 소리가 때로는 심오하고, 황홀할 수 있다는 진실을 우린 그때 몰랐습니다. 아무리 작게 소리를 내도 더 작게 내라며 눈을 부라리는 지휘자의 요구를 맞추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든 학교 밴드부든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피아니시모가 지금 이 대목에서 왜 중요한지, 그리고 잘 연주된 피아니시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은 채 덮어놓고 작게 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애국가에 넋이 나갔던 그 사건은 피아니시모에 대한 이런 그릇된 오해를 단 몇 초 만에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애국가를 근사하게 지휘해 보고 싶다는 제 꿈은 10·26, 12·12, 5·18, 6·10을 거치면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국가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고, 애국가가 과도하게 중요해지는 현실에 나까지 애국가에 힘을 보탤 필요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급기야 애국가를 불렀느냐 안 불렀느냐 따위로 종북 딱지까지 붙이려 드는 현실을 만나고 나니 더는 애국가를 근사하게 연주해 보고 싶은 꿈을 간직할 이유가 없더군요. 그래서 애국가에 대한 꿈을 미련 없이 휴지통에 처넣었습니다.
애국가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자리에서 감동을 받았던 곡들이 빈자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 곡들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곡은 에반스H. R. Evans가 작곡한 ‘축복’입니다. 산상수훈의 8복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 곡이 좋아질 무렵 제게는 조그만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담임 목사는 사회적으로 꽤나 높은 자리에 있는 교인을 안수 집사로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교역자 회의에선 그 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높으신 양반은 공동의회에서 2/3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일 평균 출석이 100여 명을 조금 넘는 교회에서, 공사가 다망하다는 이유로 주일에 얼굴 뵙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고, 지금은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조그만 가정적인 결격 사유도 쉽게 용납되지 않았던 경직된 분위기 탓에 표를 많이 못 얻었던 것입니다.
엉뚱하게도 그 불똥은 제게로 튀었습니다. 반대표의 근거지로 제가 지휘한 성가대가 지목되었던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 분의 장로가 우리 성가대에 열심 있는 대원으로 있었는데, 제가 두 장로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쳐 될 사람이 떨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미운 털이 박혀 있던 어느 주일에는 지도하던 청년부 주보에 쓴 칼럼이 문제가 되어 연습을 시키다말고 불려갔습니다. 연습하기도 짧은 시간에 엄한 꾸중을 듣고 주일 찬양을 했는데, 그날 찬양이 마침 ‘축복’이었습니다. 묘한 우연이었습니다.
눈물을 억누르지 못하고 ‘축복’ 지휘를 했습니다. 그 이후 이 곡을 더 아끼게 되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몇 해 동안은 송구영신 예배 때마다 이 곡을 찬양했고, 임직식이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도 자주 꺼내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 곡이 눈에 보였습니다. 곡의 마지막인 “하늘의 상이 크도다”라는 부분을 에반스가 어떤 마음으로 작곡했는지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 뒤로는 악보가 아니라 종말의 심판 장면이 머리에 그려졌습니다. 여기저기 연주를 들어보아도 저처럼 해석하는 연주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 해석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 때문에 이 곡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곡으로 찬양하려고 할 때마다 주저했습니다. 맡았던 여러 성가대들에는 이 곡의 바리톤 솔로를 제대로 불러줄 만한 솔리스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소리가 되는 성악 전공자이면 깊이 있는 해석이 아쉽고, 지휘자가 표현하려는 것을 잘 알아차린 비전공자는 목소리가 따라주지 못하는 식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제 가슴에 오래 머물렀던 곡은 가사도 곡도 내세울 것이 없는 소박한 노래였습니다. 좀 보수적인 분들이라면 이런 곡을 어떻게 주일 예배 때 성가대 찬양으로 올릴 수 있느냐 따질 정도로 말입니다. CCM 전문 작곡가로 알려진 윌리엄 게이더William J.Gaither의 작품인데다 70-80년대에 유초등부 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곡이었거든요. 쉬운 걸로 치자면 개척 교회 성가대도 소화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소박한 이 곡을 사랑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거나 지휘를 할 때면 냇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제 또래의 아이들은 여자 남자를 가릴 것 없이 예쁜 조약돌을 주웠습니다. 냇가에서 주을 때도 있었지만 머리를 처박고 흐르는 물속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 노래는 묘하게도 그때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이 노래의 가사가 두 개 버전으로 존재합니다. 애착을 가졌던 가사는 어린이들이 주일학교 예배 때 부르던 바로 그 가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옛 버전 가사에서 좋아했던 바로 이 대목만 기억합니다.
사랑하며 섬기겠어요.
생명주신 예수님
버려진 날 찾아오셔서
내게 생명주셨죠.
현재 제가 소장하고 있는 성가곡집에 나온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으로 주를 섬기리/새 생명을 주셨으니/주가 나를 찾으시기 전/아무것도 아닌 나/슬픔 상한 심령/그를 위해 주님 죽으셨네/주 손길 갈망했었네/새 생명을 주셨네.”
이 찬양도 지난 20여 년 동안 꽤 여러 번 지휘를 했습니다만 만족할 만한 연주는 아직 못했습니다. 버려진 날 찾아오셨던 주님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는 일이 제겐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이 곡을 다시 지휘해 볼 날이 올까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나이를 더 먹으니 애국가를 대신했던 빈자리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직도 브람스의 레퀴엠 6번째 곡인 “여기엔 영구한 도성이 없고”, 멘델스존 2번 교향곡 <찬양의 송가> 중 7번 합창 “이제 밤 지나고”,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등은 여전히 근사하게 지휘해 보고 싶은 레퍼토리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F장조 미사> BWV 233이나 교회 칸타타들이라도 지휘해볼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헨델의 <유다 마카베우스>, 베토벤의 <장엄미사>,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 이건용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도 기회만 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그런 곡을 잘 해 보고 싶은 간절함이 예전만 못합니다. 어떤 특정한 곡이 아니라 성가대라면 모두가 하는 묵도송, 기도송, 헌금송, 송영 등이 애국가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대다수 성가대원들의 의식 속에 이런 곡들은 찬양이 아닙니다. 이런 곡들은 설교 전의 찬양처럼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틀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원들은 일어서서 하는 그날의 찬양 때만 성가대원일까요. 속은 알 수 없지만 제겐 그렇게 보였습니다. 주로 그런 대원들이 성찬을 받을 때나 대표기도 시간엔 거기 집중하다가 찬양이 시작되고 나서야 눈을 뜹니다. 물론 기도의 내용에 집중하는 게 신자로서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기도든 성찬이든 거기에 집중하느라 자기 역할을 잊는다면 좋은 성가대원일 수는 없겠습니다. 성가대원은 예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겨우 예배 사회자를 따라가는 형국이라면 글쎄, 저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가대원들에게 링에 올라가는 선수들 이야기를 자주했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은 라커룸에서부터 이미 머릿속에서 경기가 시작됩니다. 때문에 라커룸에서부터 링으로 이동이 끝날 때까지는 오로지 준비한 전략에만 집중합니다. 코치나 감독이 말을 시켜도 고개만 끄덕입니다.
그런데 성가대원들에게서 링에 오르는 선수 정도의 긴장이나 하나님과 시선이 고정되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함을 발견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연습에서 모아진 하나의 마음은 예배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에 웃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다 허물어버리기는 일을 거의 매주일 하였습니다. 아무리 침묵 가운데 하나된 마음을 움켜쥐고 이동하라고 해도 그때뿐입니다. 마치 그런 일은 설교자나 지휘자인 너희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듯 말입니다. 이런 일들을 오래 겪다 보니 “찬양을 잘 하면 뭔 소용이냐”라는 생각이 점점 더 절실해지더군요.
묵도송은 음악 실력으로 잘 하는 게 아닙니다. 묵도송부터 축도송까지의 전 과정이 성가대에게는 문제가 되고, 성가대는 그 전부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만 묵도송이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매번 반복하는 묵도송은 그런 태도가 아니라면 새롭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재작년까지 지휘를 했던 교회 성가대에서는 “먼 훗날 묵도송을 잘 했던 지휘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이야길 종종했습니다. 성가대의 영성은 준비된 그 날의 화려한 찬양에서가 아니라 늘 하는 묵도송에서 실체를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다시 지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8에서 16마디에 불과한 묵도송, 지난주에도 했고 다음 주에도 또 하게 될 그 묵도송에 마음을 더 오롯이 담을 참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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