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평화의 시작

김기석의 톺아보기(2)

 

쉼, 평화의 시작

 

 

활동보다는 존재가 먼저

 

“편안해 보이시네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니까 잘 적응이 안 되는데요. 늘 뭔가에 쫓기듯 살아왔는데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손에서 할 일을 내려놓으니까 불안하지요?”

 

“불안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낯설어요. 마룻바닥에 엎드려 책도 보고, 멍하니 천장도 올려다보고, 졸리면 낮잠도 자고….”

 

“수양회를 준비하는 분들이 ‘주제를 뭘로 할까요?’하고 묻길래, ‘쉼, 평화의 시작’이라고 말하니까 좀 당황스러워하더군요. 수양회를 잘 하려면 뭔가 이벤트를 만들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하는데, 담임목사라는 이가 이번 수양회는 교인들을 좀 심심하게 내버려두라고 하니까 고개를 갸웃거려요. 하지만 사람은 심심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창조적이 돼요. 정히 할 일이 없으면 풀잎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든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든지, 뒹굴거리는 친구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이야기를 걸든지, 부엌에 가서 고구마줄기라도 다듬든지 하겠지요. 그러다가 모처럼 성서를 읽어볼 생각이라도 하면 고마운 거고.”

 

“저는 이번에 정말 쉬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요?”

 

“그동안 우리는 자기가 행하는 일(deeds)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고 살아온 것 같아요. 분주함 속에 있어야만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한다고 할까요? 너무 바쁘면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하지만, 분주함보다 더욱 견디지 못하는 것은 한가함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몇 해 전에 아주 분주한 자리에서 일하다가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는데요, 그는 겉으로는 잘됐다고 말하면서도 영 불안해 보였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상한 상실감이 그를 놓아주질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없이도 한 조직이 별 탈없이 굴러간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루에도 몇 가지씩 일을 만들면서 시간을 견뎌나갔는데, 결국 그에게 찾아온 것은 더 큰 허탈감이었대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수첩 속표지에 ‘Do less, Be more’라는 구절을 써놓았어요. 자꾸 일을 만들지 말고, 존재에 집중하자는 거지요. 숯 검댕이 묻은 손으로 남의 옷을 털어줄 수는 없잖아요. 내가 평화롭지 못하고, 내 속에 기쁨이 없다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름다울 리가 없지요. 활동보다는 존재가 먼저인 것 같아요.”

 

 

 

                              사진 김승범

 

 

한가한 사람이 곧 등한한 사람은 아니다

 

“제가 보기엔 목사님은 너무 바삐 사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그렇게 보여요? 참 문제네. 목사가 여유로워야 교인들을 닦달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나? 한가로움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래요. 허균이 《한정록》에 옮겨놓은 글 가운데 ‘조물주가 사람에게 공명과 부귀를 아끼지는 않으나 한가한 것만은 아낀다’는 구절이 나와요. 그 글은 과도한 욕심이 우리 삶을 분망하게 하고, 그 분망한 삶이 정신의 피폐를 낳게 되는 과정을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다행히도 집에서 먹고 지낼 수만 있다면 정말 한가한 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돈지갑만은 꼭 간수하려고 손을 벌벌 떨고, 금전출납부만을 챙기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먹고 있으니 어찌 낮에만 부산하여 바쁘겠는가. 밤 꿈에도 뒤숭숭할 것이다.’ 꼭 우리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뒤에 그는 이런 시구를 덧붙였어요.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不是閑人閑不得

閑人不是等閑人

 

“한가함은 한가한 사람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치지 않아요?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 주는 계발적 깨달음도 있고요.”

 

“공감이 가네요.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도 사람마다 반응하는 방법은 제각각인 것 같아요. 어떤 이는 죽도록 괴로워하지만, 어떤 이는 현실을 가볍게 박차고 솟아오르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한가하게 지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온 것 같아요. 굴곡 많은 역사의 변전 과정에서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역사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거든요. 그게 제 의식을 옥죄었고 분주한 삶을 택하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한가한 사람이 곧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은 제게 상당히 도전이 되네요.”

 

“몇 해 전인가요. 진보적인 젊은 언론인 한 사람이 신문 컬럼을 통해 이현주 목사를 ‘얼치기 도사’라고 칭한 적이 있었어요. 현실은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는 언어 놀음이나 하면서 젊은이들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난 그 칼럼니스트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어요. 현실 참여라는 것이 꼭 선동적인 언어와 구호로 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오히려 현실이 난마처럼 얽혀든 시대일수록 경전을 깊이 파고드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실이 중심을 바로 잡아야 씨실로 천을 짤 수 있잖아요? 물론 그 언론인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그를 화나게 한 것은 이현주 목사의 치열한 구도정신과 사유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어설픈 흉내내기였을 거예요. 유사품(?)에 주의해야지요. 가짜일수록 진짜처럼 보이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그의 언어 폭력은 경솔했어요. 이현주 목사는 결코 등한한 분은 아니에요. 그만큼 철저한 분을 저는 별로 보지 못했어요.”

 

“모두가 다 그분처럼 살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물론이지요. 공평함이 없는 세상을 향해서 악을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돌멩이를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목사님이 돌멩이 드는 것을 긍정해도 되나요?”

 

“그러다가 쫓겨나겠지요?”

 

和而不同의 지혜

 

“길이 서로 다른 듯싶어도 결국은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목표가 같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모색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가 제일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나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이 아닐까 싶어요.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생각해 보는데, 어쩌면 독재정권 아래서 살아온 삶의 관성 때문이 아닐까요? 지난 시절 우리는 ‘다른 언어’로 말할 수가 없었지요. 독재자를 뜻하는 ‘dictator’는 ‘혼자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대요. 말이 곧 권력인데, 독재자는 말을 독점한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와 다른 언어나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불온시해요. 더 무서운 것은 우리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재자의 사고에 동화되어 다른 사고와 언어를 가진 이들을 불온시한다는 사실이지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 혹은 ‘국론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요. 그건 다양한 모임 속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모임의 주류 언어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 조직의 쓴맛(?)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독재자가 좋아하는 단어는 ‘일사불란’(一絲不亂)이라면서요?”

 

“1970년대를 돌아보면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아요. 장발 단속을 한다고 경찰들이 바리캉(이발기)을 들고 서 있질 않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잰다고 자를 들고 서 있질 않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기존체제에 대한 소시민들의 문화적 항거였는데, 독재자는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거지요.”


“새마을 노래 생각나세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 나라를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로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가꾸세.’ 이 ‘새 나라’에서 초가집은 가난의 상징이고, 게으른 사람은 설 자리가 없지요. 사회 전체 분위기가 가난과 게으름을 악으로 보는 생각을 우리 속에 주입한 것 같아요.”

 

“전체주의적 사고가 삶의 여백을 박탈하고 그 속에 획일적인 생각을 주입한 거지요. 그때부터 분주함은 한 사람의 유능함의 표지처럼 인식되었고, ‘돈’이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고, 이웃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돌변했지요. 물질이 늘어날수록 이웃간의 담은 높아지기 시작했고요. 고샅길을 느긋하게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또 차가 걷기를 대체하면서 진정한 만남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지요.”

 

“가이슬러라는 사람은 느림이 우정을 발견했다면서, 빠름에는 친구가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교통수단일 뿐이라는 거지요.”

 

“노자는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24장] 고 했어요. 까치발로 선다는 것은 결국 남보다 크게 보이려는 것이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걷는다는 것도 남보다 앞서 가려는 것인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몸짓이지요. 지금 우리가 꼭 그런 형국인 것 같아요.”

 

“쉼을 갈구하면서도 쉴 줄 모르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안식일’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창세기에는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마치시니’(2:2)라는 구절이 나와요. 물론 개역성서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라고 번역함으로써 교묘하게 신학적 혼돈을 피해가고 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제칠일에도 창조행위가 있었다고 풀어요. 즉 제칠일에는 ‘메누하’(안식)가 창조되었다는 거지요. 여기서 메누하는 행복, 고요함, 평화, 휴식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래요.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쉼이라는 거지요. 이때의 쉼은 그러니까 빈둥거린다든지, 기분 전환을 위해 신나게 노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겠지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일상의 노동을 통해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데서 오는 열매일 거예요. 실제로 정신이 배제된 몸과 마음의 휴식이라는 게 일쑤 타락으로 귀결되는 것을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어요. 하나님은 피곤하셨기 때문에 쉬신 것이 아니라 쉼 자체가 창조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뒤집힘에서 비롯된 위기

 

“주5일제 근무가 정착되면 사람들이 제대로 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진정한 쉼을 연습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소비산업이 제공하는 휴가 문화에 종속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이 되거나,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휴가 문화에도 빈부귀천이 나타나면, 몸은 쉬면서도 마음은 쉬지 못하는 거지요.”

 

“결국 우리가 제대로 쉴 줄 알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생태학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결에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들 혹은 사물들 앞에 문득 멈춰서고, 말을 건네고,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감촉을 느껴보고, 경탄하고, 우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지금 경기가 좋지 않다고 다들 아우성인데, 물론 그건 절실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에요. 이렇게 얘기하면 한가한 소리한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에 가르쳐주신 관상기도를 드리면서 저는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늘 활동 속에서 존재의미를 찾다보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은 채 살아온 거지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지향만 간직한 채 침묵 속에 머물면서, 자신을 낯선 존재로 경험했어요. 제 속에 그렇게도 많은 생각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왜 진작 자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추하고, 비굴하고, 욕심스럽고, 이기적이고, 정욕에 찬 제 모습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래도 ‘나는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존재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닌가봐요.”

 

“너무 자책하면 안 되요. ‘이게 바로 나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니까요.”

 

“그런데 20분 동안을 그런 분심(分心) 상태 속에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이 끊어지고, 고요해지는 시간이 있더군요.”

 

“그 시간은 어쩌면 단 한 순간도,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나’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관습적인 방식,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또 반응하는 방식이 잠시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평화를 맛보게 되지요. 어느 분은 그것을 ‘주입된 평정’(infused recollection)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만들거나, 나의 의지가 조작한 것이 아니니까요.”

 

“참 좋다는 생각은 드는데, 집에 돌아가서도 이 기도를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상의 흐름을 끊고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기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고, 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공간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고요.”

 

“쉽진 않겠지요. 기도도 훈련이에요. 내 기분이나 형편에 따라서 하다 보면 영혼이 자랄 수가 없어요. 옛 사람들의 진리 공부는 ‘수신,’ ‘수양,’ ‘수행’을 기본으로 했지요. ‘성의,’ 즉 뜻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을 오로지 해서 노력하는 일은 기본이고요. 제가 속상해 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너무 건성으로 한다는 거예요. 요즘 ‘느림’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꼭 예로 드는 게 포도주인데, 포도주는 오랜 시간을 품고 있다는 것이지요. 수확, 저장, 숙성의 시간 말이에요. 그래서 포도주를 즐기는 것은 시간과 화해하고 살려는 시도이고 시간을 질로 채우려는 시도라고 말하지요. 포도주에 대한 대단한 예찬인 셈인데, 설익은 삶에서 존재의 향기를 기대하기란 어렵지 않겠어요. 신앙생활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지 않아요. 항상 더 바쁜 어떤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삶의 우선순위에서 진리공부는 항상 뒤로 밀리는 거지요. 문제는 그렇게 살다보면 진리공부의 기회는 영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부끄럽네요.”

 

“부끄러우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게 우리 현실이에요. 사람살이에서 ‘선’과 ‘후,’ 혹은 ‘본’과 ‘말’을 구별하는 게 지혜일 텐데, 우리는 그것을 뒤집어서 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우리 생의 위기는 알고 보면 그런 뒤집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라요. 많은 사람이 수도원적 삶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그건 어쩌면 전례를 중심으로 시간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시간 경험을 새롭게 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개회 예배 때 사티쉬 쿠마르를 인용하시면서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하셨지요? 겸손, 봉사, 공부, 잠자는 것이었나?”

 

“맞아요.”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잠을 잘 자야 덜 억압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평범한 듯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라 생각했어요.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회의 시스템, 국제관계도 매우 중요하지만, 평화의 못자리는 평범한 일상이잖아요. 밥 먹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놀고, 공부하고, 잠자고….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늘 어떤 강박관념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쉼이 곧 평화의 시작이라는 말씀은 자칫하면 배부른 자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쉼이 없는 평화란 없지요.”

 

“해야 할 일을 잠시 내려놓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유보하고, 푸른 나무, 푸른 잔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 것 같네요. 족구하러 가지 않을래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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