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4)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신문을 보아도 뉴스를 들어도 어제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이 별반 다르지 않다. 메르스 여파로 인한 파장으로 온 나라가 흔들려도 정부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정치인들은 서로 깎아내리고 흠집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는 다반사가 되었다. 남북한의 긴장과 대립은 해소될 줄 모르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억지 부리는 강대국들의 횡포도 변함이 없다. 남을 모욕하고 부정함을 통해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평화를 거스르는 일이며, 반생명적인 폭거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 주한미군의 탄저균 실험에 대한 이 나라 정부의 대처는 또한 어떠한가. 이런 일들을 하도 많이 겪다 보니 무슨 소식을 들어도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어떤 허구도 현실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우렁잇속 같은 현실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가? 기막힌 소식을 들어도 우리 가슴은 반응하지 않는다. 차를 멈추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백색 실명 상태에 빠지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주인공처럼, 갑자기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둠이 손짓하는 날이다. 나라는 존재도 낯설고, 바깥세상도 낯설기 이를 데 없다. 나만 빼놓고 온 세상이 공모하여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더라는 부정적 경험이 축적되면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세상의 불의함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이들은 번번이 좌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선으로 들이대는 선에 비해 악은 집요하고 교활하고 미끌미끌하다. 아,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아뜩함과 무력감은 어느 순간 우리를 성찰의 자리로 데려가 지금까지 열중하고 있던 일들, 소중히 여기던 것들에 대해 재평가 할 것을 요구한다. 원점에서 사고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풀꽃 하나 속에 담긴 우주를 보고, 벗들과의 살가운 만남에서 영원의 손길을 느낀다. 바야흐로 세상이 만들어놓은 매트릭스에 틈이 생기는 순간이다. 먼빛의 눈길로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욕망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내적 자유가 유입된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연한 말을 기억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허황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을 망각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이들과 더불어 새 세상이 도래한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과부와 같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희망의 나무는 커지지 않겠는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 편집자 주/이 글은 필자가 예전에 쓴 글로, 지금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여 저자의 허락을 받아 편집하여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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