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10)
민들레
- 동화 -
“얘들아, 오늘은 엄마가 너희들에게 중요한 얘기를 들려줄게.”
엄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낮고 차분합니다.
“뭔데요, 엄마?”
엄마 가슴에 나란히 박혀 재잘거리던 씨앗들이 엄마 말에 모두들 조용해졌습니다.
“머잖아 너희들은 엄마 곁을 떠나야 해. 제각각 말이야.”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고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씨앗들이 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떠나야 해. 떠날 때가 되었어. 보아라. 너희 몸은 어느새 까맣게 익었고, 너희들의 몸엔 하얀 날개가 돋았잖니?”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모두들 놀란 얼굴이 되었습니다.
“싫어요, 엄마. 우린 언제나 엄마랑 함께 살 거예요.”
“우리들끼리도 헤어져야 한다니 너무 무서워요.”
“엄마 곁을 떠나면 우린 어디로 가지요?”
안 된다고, 싫다고, 씨앗들은 너도나도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 그래. 너희들 마음 엄마가 잘 알아. 엄마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떠날 땐 떠나야 한단다. 너희들을 잘 떠나보내는 것이 엄마가 너희들을 위해서 해야 할 마지막 일이지.”
엄마가 차례대로 씨앗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비록 너희들이 엄마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우린 언제나 곁에 있는 거야. 모두 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같은 꽃을 피워내는 것이니까.”
알 듯 모를 듯한 엄마의 이야기가 찬찬히 이어졌습니다.
씨앗들의 투정이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 두어라. 마음속에 잘 새겨두어야 해.”
씨앗들이 엄마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먼저, 너희들의 몸이 가벼워야 해. 가벼워야 바람을 탈 수 있고, 그래야 너희들은 자기의 세상으로 떠날 수 있지.”
“몸이 가벼운 게 뭐지요? 어떻게 해야 가벼울 수 있나요?”
씨앗들이 물었습니다.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해.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가벼워질 수가 없어. 몸이 가볍기 위해 너희들이 조심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는데, 다름 아닌 이슬이란다. 목이 마르더라도 몸에 내린 이슬을 털어 버려야 해. 젖은 몸으론 자기 땅을 찾아 갈 수가 없거든.”
“자기 자리가 어디인 줄은 어떻게 알 수가 있나요?”
씨앗들은 궁금한 게 많습니다.
엄마는 차근차근 대답을 합니다.
“그건 바람이 가르쳐 줄 거다. 바람을 믿으면 돼. 아무리 좋아 보이는 자리라도, 바람이 너희를 태우면 떠나야 해. 아무리 싫은 자리라도, 바람이 멈추면 내려야 하고. 바람만 믿으면, 너희들의 자리는 분명 알 수가 있단다.”
“몸이 가벼워야 한다… 바람을 믿어야 한다…”
씨앗들은 엄마 말을 마음속으로 따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너희들이 알아야 할 건 '땅내'를 잘 맡아야 한다는 거야.”
“땅내가 뭔데요, 엄마?”
씨앗들이 또 물었습니다.
“땅내란 흙냄새를 말하는 거야. 흙에서 나는 냄새 말이야.”
“흙에도 냄새가 있나요? 맡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흙에도 냄새가 있지.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는 곁에 있는 것을 더 모를 때가 많단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무얼 좋아하는지, 냄새는 어떤지 묻지를 않는 거야. 그러니 모를 수밖에. 우리도 흙과 너무 가까이 있어 흙을 모를 때가 많지.”
씨앗들이 숨을 죽이고 냄새를 맡아봅니다. 바람 속에 무언가 담겨져 있는 것이 느껴질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엄마, 흙냄새를 왜 잘 맡아야 한다는 거죠?”
엄마와 얘기하는 씨앗들의 목소리가 점점 또랑또랑해 집니다.
“그래, 아주 중요한 걸 물었구나. 너희가 흙냄새를 잘 맡아야 한다는 건, 거기가 바로 너희들이 살아갈 곳이기 때문이지. 너희들이 뿌리 내릴 곳은 흙밖엔 더 없단다. 이 세상은 점점 흙이 사라지고 있어. 콘크리트라고 하는 이상한 것들로 뒤덮여 가고 있지. 그럴수록 너희들은 흙냄새를 잘 맡아야 해. 어디든 흙이 있는 곳에는 너희가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해.”
“흙냄새… 흙냄새…”
씨앗들이 다시 엄마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합니다.
“자, 지금부터 숨을 깊게 쉬며 냄새를 맡아 봐. 그리고 지금 맡은 이 냄새를 잘 기억해 두렴.”
씨앗들이 엄마 말을 따라 땅을 향해 냄새를 맡습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 중 어느 게 흙냄샌지, 엄마 곁을 떠나서도 그 냄새를 기억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또 한 가지 너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 뿌리에 관한 것이지.”
“뿌리요?”
“그래, 뿌리.”
“왜 우리에게 뿌리가 중요하나요?”
“응, 뿌리란 너희가 아는 대로 땅 속으로 뻗어 물을 찾는 것이지. 뿌리가 너희에게 중요한 건 뿌리가 땅에 묻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야. 남이 보지 않는다고 뿌리를 뻗는 일에 게을러지기가 쉽거든.
사실 뿌리를 뻗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때론 돌이 가로막기도 하고, 때론 흙이 딱딱해 숨이 막히기도 하지. 그래도 뿌리는 뻗어야 해. 위로 피어나는 꽃의 높이보다도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거란다.
만약 뿌리를 뻗어도 물이 없다면, 가물 때엔 가끔씩 그럴 수가 있지, 그 땐 자라기를 당분간 멈춰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모두 마르게 된단다.“
“뿌리, 뿌리, 뿌리…”
씨앗들은 또다시 엄마 말을 마음속으로 따라 합니다.
“다음으로 잊지 말아야 할 건…”
“아직도 또 있어요, 엄마?”
씨앗들이 엄마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엄마가 하는 말이 쉽지도 않고, 오래도록 얘기 듣는 일이 힘도 듭니다.
“그래, 엄마 이야기가 길지? 그래도 한 가지만 더 하자. 이건 너희들을 향한 엄마의 바람이기도 하니까.
너희는 어느 곳에 떨어지든지 그곳을 사랑해야 한단다. 너희들 중에는 꽃밭과 같이 좋은 곳에 떨어질 씨앗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씨앗이 더 많을 거야.
자갈밭에 떨어지기도 할 거구, 갈라진 벽돌담 틈새로 떨어지기도 할 거야. 빈 들판 논둑이나 밭둑일 수도 있고, 무덤가일 수도 있어. 빈 집 뜨락일 수도 있고, 더러는 진흙탕 속이나, 심지어 똥 위에 떨어지는 씨앗도 있을 거야. 길 위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힐 수도 있을 거구.
그렇게 너희들이 떨어지는 곳이 어디라 할지라도, 그곳을 사랑하렴. 왜 하필 나만 나쁜 곳에 떨어졌냐고 원망일랑 하지 말구. 원망은 살아 있는 것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내가 내린 그 곳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단다.”
엄마 말에 간절함이 넘쳤습니다.
“내가 내린 그 곳을 사랑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엄마?”
“그건 아주 쉬운 일이란다. 내가 내린 그곳에 뿌리를 깊숙이 뻗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는 일이지. 그러면 되는 거야. 그것밖엔 없단다.”
밤이 깊어갑니다.
엄마 품에 안겨 하얀 날개를 단 씨앗들이 마음속에 꼭꼭 엄마 이야기를 담아 둡니다.
어둠이 가득한 언덕, 민들레 가족은 더없이 밝은 한 개 등불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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