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9)
글자 탓
요 며칠은 예배당 주위의 풀 뽑는 일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예배당 마당 구석구석에 풀들이 제법 자라 올랐다. 잡초는 밤에도 잠을 안 잔다더니, 잠깐 잊고 있으면 어느새 욱 자라 있고는 한다.
저녁나절 괭이로 풀을 긁고 있는데 예배당 옆집에 사는 승혜가 책 하나를 끼고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예쁜 여자 아이다. 옆구리에 끼고 온 책을 보니 <바른생활>이다.
다음날 배울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읽어가는 것이 선생님이 내준 숙제라고 했다. 지난번 받아쓰기 때 좋은 성적이 아니었던 승혜에겐 바른 생활 과목이 썩 내키는 과목은 아닌 듯싶었다.
승혜가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가며 책을 읽는다. 그러나 곳곳에서 막힌다. 어둘 녘까지 승혜는 내가 풀을 뽑는 곳을 따라다니며 책을 읽었다. 가만 보니 승혜는 삽화를 보고 감(感)으로 읽고 있었다. 그러니까 곳곳에서 글자 수가 안 맞을 수밖에.
승혜가 책 읽는 걸 가르쳐주다가 내심 당황했던 건, 승혜가 글자를 잘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다. 글자보다는 책에 담긴 내용을 모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큰 문제였다.
다음날 배울 것은 아이들의 사회생활을 일러주는 내용이었다. “오늘은 목욕탕엘 갔습니다.”, “오늘은 공원에 갔습니다.”, “오늘은 놀이터에 갔습니다.”, “오늘은 도서실에 갔습니다.”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책 속의 그림을 보면서 어디에 다녀왔는지를 네모 칸 안에 적어 넣어야 하는데, 목욕탕이며 공원이며 놀이터며 도서실이며 어느 것 하나 단강엔 있는 것이 없다. 공원과 도서실이 뭐하는 곳인지를 승혜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 본 적도 경험을 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승혜야, 어렵지?”
승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어렵지, 어렵고말고. 내가 봐도 어렵구나. 아직 어린 너는 어려운 글자 탓만 하겠지만….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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