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23)
언제 예수가 깨끗한 부자가 되라고 가르쳤나?
오늘날 교회의 강단은 보다 쉽고 보다 편하고 보다 재미있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대중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심드렁해진다.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힘든 판국에 교회에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오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성공’과 ‘부’가 가미되면 금상첨화다. 그러기에,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추종하려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시장의 논리’란 대중들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다. 보다 많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말씀의 내용과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 부흥의 원리가 되고 있고, 성도(聖徒)라고 표현되는 교회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성서가 증언하는 ‘참된 복음’과는 한참 멀게 되었다.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욥기 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마가복음 9:2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
이 세 구절은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 성장 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성서의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이 말씀을 듣고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재기의 의욕을 불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는 이러한 의욕의 무진장한 공급처였으며 그로써 한국 사회의 발전을 보다 힘 있게 지원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가 겪은 가난과 열등감과 목표 상실의 현실에서 풍요와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슬로건처럼 이 세 구절은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 이해는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힘겨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의 언어’로 신앙인들을 사로잡아왔다.
기득권에 눈 먼 허가 받은 축복의 배급자
믿음이 좋은 것은 세속적 현실에서의 능력과 관련이 있고, 그로 해서 ‘성공’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가 되었다. 낙오는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으며, 따라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서 능력을 얻어 현실에서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의 정도와 내용이 높고 풍족할수록 축복을 많이 받은 존재로 인정되는 인식 체계를 한국 교회 안에 자라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목회자는 ‘허가 받은 축복의 배급자’처럼 그 위치를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특권적 위계질서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적 위계질서는 정치·경제적인 특권과 연결되면서 한국 교회를 기득권 세력화했으며, 그 기득권의 방어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져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가 요구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를 강화시켜왔으며, 이로써 이러한 체제가 추구하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온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인가,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성공주의의 윤리적 기초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와 의’라는 대전제는 이러한 성공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 자리가 없었으며, 오로지 세속적 능력과 위치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으면 그로써 축복이 확인되는 시스템이 가동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이며,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
그러나 성서의 근본정신은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무너질 것을 보고, 패배하는 듯하지만 위대한 시작을 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그 중심이 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섭리의 핵심이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목격했지만 신앙은 거기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의를 위한 헌신은 그 무엇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은 전혀 다른 평가 속에 놓이게 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몰락과 패배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나라와 의에 접붙여진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광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고 그로써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간과 사회가 병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적 타락과 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저울’에서 맛보는 허탈한 인생의 무게
사실, 성공을 전제로 한 세상의 견해와 여론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외면적 가치 기준에 사로잡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실의 면모에 눈멀기 쉽다. 세상은 가진 것과 누리는 것과 쌓아올린 지위와 지식 그리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존재 여부로 판세를 읽는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그것이 그 소유자의 인간성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 기준에 따라 잘난 인간과 못난 인간이 구별되고, 성공과 실패가 나누어지며 존경과 멸시가 갈라진다. 이 기준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세(大勢)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내리는 결론이다.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의 저울’에 올라서서 자신의 인생과 현실의 무게를 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교만이나 열등감이 나오고, 허영이나 패배 의식이 나오며, 만용이나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실로 온통 이 저울에 수시로 자신을 올려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바쁜 나날들이다. 그래서 그 저울의 눈금이 자신의 무게를 얼마만큼으로 표시하는가에 매달려, 기뻐하기도 하고 낙망하기도 하며, 뻐기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령 욕망의 달성을 성공으로 착각하고, 그 과정에서 황폐해진 인간성은 성공 이후 교만해지거나 타락한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욕망의 성취가 낳는 열매는 그런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생의 무게는 허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작 우리의 인생을 달아보아야 할 저울은 ‘하나님의 저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저울도 때로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을 달아볼 수 없으며, 또는 우주 전체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생명을 달아볼 수 없다. 마음의 진실을 달아볼 수 있는 저울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마음이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도, 이 세상의 가장 큰 것도 들어갈 수 있는 자리이다. 바로 그 ‘마음자리’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재는 저울을 어디에서 발견하겠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 또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삶 가운데 어떤 진실이 있는가에 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룬 듯해도 그것이 그 인간의 진실 됨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허사이다. 얼핏 보기에는 아직 미미하고 초라할지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저울에서 참된 무게를 드러내는 삶이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먼저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의 인생을 달아 그로써 자신의 삶이 가진 가치와 진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큰 힘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진실과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 진정한 능력은 그로써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힘이 아니겠는가.
청부론이란 외피 두른 포장된 성공주의
이제 복음으로 포장된 성공주의는 요즈음 ‘청부론’과 ‘훌륭한 거부’라는 외피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강하고 부한 것을 열망하면서 그 기회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탐욕과 야망과 죄와 교만과 차별 등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래서 그 그물망을 찢고 그로써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영혼을 해방시켜야 하는데 교회가 그런 일에 나서기보다는 오히려 당대의 주류에 들어설 것을 부추긴다.
권력을 쥔 ‘깨끗한 부자’가 선망의 대상이다. ‘깨끗한 부자’와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잘 되어 간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구호도 없을 것이다. 손가락질 받는 부자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존경을 한 손에 거머쥘 방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짱’이다. 양손의 떡이다.
게다가 믿음만 좋으면 그저 영적 성숙만이 아니라 물질적 형통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판국에 마다할 까닭이 없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뭐 문제인가, ‘잘 벌어서 잘 쓰면 되지’라는 주장,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는 ‘기복주의’라는 비난도 이렇게 면할 수 있다. 신앙과 물질이 모두 풍요하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태, 실로 ‘종교적 엑스터시’가 아니지 않는가?
주류가 되고 싶은 신자들이여…
한국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총리 후보로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황교안 씨도 항간에 돈독한(?) 신앙인임을 내세우지만 벌써 여러모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사회의 타락과 부패의 사슬에 관련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 당혹스럽다. 목사와 장로들이 사회적 비리와 관련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교회의 장로는 과거의 꿋꿋하면서도 엄격한 모습의 경건한 신앙인의 모범적 모델에서부터, 어느새 ‘부’를 거머쥔 기업체의 이사 정도의 모습으로 그 종교적 이미지가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기존의 주류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하려는 것을 이른바 ‘성공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부추기는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하나님나라의 의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실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세속적 성공이 바로 성공이라는 착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의 신을 모두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우리의 신앙에서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일에 있다. 그 열매로써 얻어지는 부는 참되다. 그것은 의로운 과정과 의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 한 번 우리에게 훌륭한 거부, 깨끗한 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르친 바가 있던가?
그렇지 않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러한 문제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하도록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는 이의 길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부는 그를 진정 부유하게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겪는 빈곤 또한 그를 부유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믿고 사는 자에게 ‘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의와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그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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