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 마당(20)
차이는 존중해야 하고 차별은 거부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서 창조되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의 기준은 인류사회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인권선언이다. 모든 종교는 신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전제하고 이를 강조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러한 선언은, 신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차이만 부각시키는 여타의 종교적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존엄성이 신적 위상을 가지고 있음을 아울러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다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는 하나님의 형상, 그러니까 그 신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인간을 모독하고 짓밟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짓밟고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성서의 기본 정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빌론제국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성서의 선언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엄성을 깨우쳤으며, 최고의 인격적 자부심을 꺾지 않고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를 길러왔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인간관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간 상호관계에서 존엄을 지켜내는 자세를 촉구한다. 따라서 ‘차별’이란 기독교 사상에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기독교인은 차별에 저항하고 차별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며, 차별을 폐지하는 운동을 펼쳐나가게 되어 있다. 차별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도리어 차별로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거나 그걸 통해 자신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기독교와 상관이 없으며, 도리어 기독교의 본질과 대적하는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이에 차이는 존재한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를 획일적으로 대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일이 된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각자의 희망과 목표가 있다. 견해의 차이도 있고 감정적 반응의 강도나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신은 왜 그래?” 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서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고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인권탄압이다. 한국 교육의 획일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개인적 차이가 가지고 있는 존엄한 가치를 살피지 않고 어떤 목표를 일단 정해놓고 여기에 다 두들겨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세상을 다양하게 만들고 우리들의 능력을 보다 풍부하게 해준다. 차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가를 일깨워준다. 그 차이가 조화롭게 결합되기만 하면 또 얼마나 멋진 세상과 대안적 현실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를 알게 한다. 차이는 그 차이로 해서 세상 사는 재미를 있게 하며, 각자 가지기 못한 바를 상대에게서 찾게 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존엄한 것이며 흥미로운 것이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총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차이를 차별과 혼동하는 일이다. 차이는 인간의 개별적 존엄성에 주목하는 반면, 차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열을 매기고 우열을 정하며 그에 따라 지배할 수 있는 자와 지배받아야 할 자를 정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진정한 대화와 관계를 봉쇄해버리고 만다. 차별로 해서 생기는 억울함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차별로 해서 생기는 특권도 생존경쟁의 당연한 결과라고 옹호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평등한 것이 아니라, 잘난 자의 권리와 못난 자의 슬픔이 공존하는 것이 본래 세상의 질서라고 가르친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고, 여자는 그에 순종해야 한다고 교육시킨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조정과 지배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랑하는 여성을 이렇게 여기는 것이 온당할까?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또한 정당한 일일까?
성적에 따라 인간의 순위를 매기는 사회가 대한민국 사회 아닌가. 제도 교육에서 성적이란 그 제도에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의 성취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다른 방식의 교육과 다른 가치관 아래 만들어지는 과제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성적이 그대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가 수학 성적이 나쁘다고 장래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수학은 잘하지만 영어는 못하는 아이가 수학과 영어를 함께 잘하는 아이보다 못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성적이 상대적으로 처지는 아이가 다른 분야에서 월등할 수 있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성품을 가진 경우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회에 보다 기여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조선족 동포들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여성들을 차별하고 모독하는 이들도 아직 우리 사회에 여전하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깔보거나, 학력수준이 다르거나 특정지역 출신이라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주변부화 하는 힘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엄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적 소수자나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대는 험악하기 그지없다. 그런 사회는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자기 자신이 겪는 아픔은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회이다. 차별은 그런 사회에서 자라나는 ‘악의 꽃’이다.
최근 서울의 어느 사립초등학교는 아이들의 교복 어깨에 견장을 단다고 한다. 녹색 견장엔 서울대 교표를 크게 수놓았고 ‘지위’에 따라 점이 덧붙는다고 한다. 학급 부회장은 1개, 학급 회장은 2개, 전교 부회장은 3개, 전교 회장은 4개다. ‘계급장’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표식은 결국 아이들의 ‘지위’를 드러낼 뿐이다.
차이는 존중해야 하고 차별은 거부해야 한다. 차이는 소중하며, 차별은 소멸시켜야 한다. 차이는 당연한 것이며 차별은 당연하지 않다. 차이는 세상을 발전시키지만 차별은 세상을 퇴보시킬 뿐이다. 차이는 은혜이고, 차별은 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아끼고 존중하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평등한 세상을 향해 가는 기독교, 그것이 나사렛 예수께서 열망하신 이 땅의 하나님 나라 그 진실한 모습의 하나이다. 다시 한 번 애기하지만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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