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가 이리 큽니다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5. 5. 13. 14:43

한종호의 너른 마당(20)

 

우리 죄가 이리 큽니다

 

 

하나님, 만물이 푸르른 계절이 왔습니다. 겨우내 숨죽여 지냈다고 여긴 생명이 알고 보니 지금의 순간을 준비하는 나름의 고투를 겪어 온 것을 새삼 알겠습니다. 그건 어딘가로 도피하거나 또는 기력이 쇠해져서 안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긴 인내와 간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꽃들이 피고 개구리의 모습이 보이고, 새들이 지저귀는 산하가 아름답습니다. 나무들이 하늘을 수놓는 화단이 되고 사람들은 그걸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이 이토록 절경입니다. 그건 애초에 에덴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깨닫게 해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리 저리 얼룩진 이 세상도 이렇듯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쁨을 따로 마련해놓으셨는데 에덴은 어떨지 감히 상상해 보게 됩니다.

 

겨울이 길면 언제 봄이 오나 하고 지루해하거나 봄이 과연 오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내심이 없고 자주 절망하고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봄이 오면 감탄을 그치지 못합니다. 생명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앞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이토록 넘칩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가 과연 이런 축복과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아무래도 이런 즐거움이 우리에게 당연한 권리나 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는 것이 죄이고, 배신이며 또한 허언입니다. 이 말 했다가 저 짓을 합니다. 저 말 했다가 이 짓을 합니다. 그걸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하나님, 지난 5월 8일 어버이 날,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그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야만의 시대를 방조하며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고은비 그림

 

내 작은 아픔에는 한을 쌓으면서도 이웃의 큰 아픔에는 무감각한 죄인이고, 크게 받은 사랑과 도움에는 실로 감사하지 않으면서 몇 번 안 되는 수모에도 차갑게 굳어지는 저희들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 자존심의 손상, 굴욕, 저버림의 순간들은 악몽처럼 잊지 못하면서, 평생의 아픔으로 못 박아 두었을 내 악한 언행은 까마득하게 잊으며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경제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많은 가정들이 힘든 고비를 겪고 있습니다. 해고 노동자들의 가정은 더욱 곤고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화사한 계절이 왔지만, 여전히 겨울의 찬바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의 위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육 현장의 혼란은 또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사회적 좌절로 가정생활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고,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판국에 마치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삭막해져 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가정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여중생, 여고생들이 자진해서 벌이고 있는 원조 교제는 이제 특별한 뉴스도 아니게 된 우리 사회의 윤리적 좌초는 미래에 대하여 자신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학부에서 최고의 인재들이 자기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자살을 한 청년들의 나약한 심성을 탓하는 목소리 이전에 우리 스스로 생명이 질식할 정도의 경쟁체제를 꾸짖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생명이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다는 깨우침을 목이 터지라고 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옆에서 부추기면서 ‘그 정도 경쟁이야 당연하지, 그걸 왜 못 이겨내’ 하고 채찍질하는 일에 가세한 죄 또한 있습니다.

 

그래도 한 때는 정의로운 길에 나서서 십자가를 앞세웠고 그것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으로 삼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 자신도 많이 변하고 만 것만 같습니다. 처음의 사랑을 버린 죄입니다. 그러고도 그걸 당연한 시대적 변화인 양 스스로 호도하고 있습니다. 어디 정의가 시대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린 복음이 일깨우는 의로움이 아니라, 달라진 정세와 형편에 묶여 있는 자들입니다.

 

회개는 습관이 되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그저 종교적 절차에 그치고 마는 저희들입니다. 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보니, 부끄럽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제는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터놓으신 길을 마다하고 제 욕심을 차리느라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고, 탐욕의 늪에 빠져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들과 딸을 둔 적이 없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이 가운데 교회의 죄는 가장 크니 어찌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라 해놓고 우리 자신은 그보다 더한 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서 손가락질을 당하고서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수치를 모릅니다. 전혀 당당할 수 없는 일 앞에서도 여전히 떳떳합니다. 신앙심 깊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던 주님. 그렇게 주님을 따랐던 교회가 가난한 교회에서 부자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버리기는커녕 더 손에 쥐려고 힘을 기울이고, 혈족이 지배하는 집단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고도 교회에 오라고 하니, 어찌 합니까? 지금의 큰 성전도 감당하기 힘든데 그보다 더 큰 성전을 짓겠다고 나서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죄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죄는 무슨 죄?”라고 더 큰 소리를 칩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뿐만 아니라 상석에 앉겠다고 돈을 뿌린 목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조직이 지금 흔들흔들 하고 있습니다. 사필귀정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을 양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 죄가 이리 큽니다. 주님, 그래서 기도의 순간에는 늘 목이 메입니다. 허튼말이 너무 많았음에 입을 막을 만큼 참말이 더딘 까닭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일로도 목이 메이는 자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렵니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죄악의 세균에 감염된 우리, 병든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 상처 받은 슬픔이 토해낸 분노와 증오와 원망이 나를 버리는 사랑의 아픔 속에서 용해되게 하소서. 이기심이 낳은 오욕과 추함을 가없는 사랑으로 씻어 주소서. 낫우어 주소서. 내 안에 아담이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소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기 42:3-6)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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