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2)
돼지의 맑은 두 눈
하나님은 스스로를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누리시는 것과 똑같이
모든 피조물을 누리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누리시되,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피조물을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누리시는 것과 똑같이
만물을 누리십니다.
세상 만물의 가장 작은 조각들에도
하나님의 지문이 찍혀 있네.
모든 원자 속에 삼위일체의 거룩한 형상이
성스럽게 모셔져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
어슴푸레 어려 있네…
내 몸뚱이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모두 다 창조주를 찬미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선언하네.
물총새는 물고기를 잡도록 만들어졌고
붕붕 우는 벌새는
꽃의 꿀을 빨도록 만들어졌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묵상하고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네.
이 시를 쓴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은 남미의 니카라구아 출신의 수도사이며 시인이다. 그는 유명한 토머스 머튼 신부가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게세마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사제로 서품된 뒤 자기 모국 나카라구아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창설된 공동체에서 봉사자로 살았다.
무릇 이 수도자 시인에게는 이 땅 위에 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돼지의 맑은 두 눈에서도 하나님의 성스러움은 드러나며, 폐결핵 환자가 뱉은 침도 카리브해의 맑은 바닷물만큼이나 깨끗하다고 말한다. 그가 이처럼 삼라만상을 너그러운 가슴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엑카르트의 말처럼 “하나님 안으로 풍덩 뛰어들어 그분과 온전한 합일을 이룬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얄팍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람들이 더럽다고, 추하다고 고개를 획 돌려버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을 떼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시궁창에 빠져 온몸을 더럽혔을 지라도 그 아이를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아니, 집 떠난 탕자가 다시 거지 신세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조건 없이 받아준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시인처럼 피조세계에 대한 단순한 사랑의 긍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온갖 물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꿰뚫어보는 시인 같은 투명한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묵상하며, 갈등과 모순의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까르데날의 시를 읽으며 내 삶의 호흡이 깊어지고 고요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 삶의 뜨락에도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융융한 희열을 맛본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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