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70’(2)
8ㆍ15해방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독립행진곡〉
우리에게 8ㆍ15는 이중성이 겹친다. 1945년의 8ㆍ15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국토분단의 날이고, 1948년의 8ㆍ15는 단독정부 수립과 더불어 북쪽에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민족분열의 날로 기억된다.
이렇게 이중적인 8ㆍ15는 이후 한반도 전체는 물론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성격을 규정하는 족쇄가 되었다. 1민족 2국가의 원천적인 비극은 미ㆍ일의 해양세력과, 중ㆍ소(러)의 대륙 국가 사이에서 대리전이라는 동족상잔을 겪게 되고, 분단ㆍ외세지향의 세력이 남북에서 각각 지배 주류가 되는 역설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1945년의 8ㆍ15는 본질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전후 동아시아체제의 구축에 결정적인 계기가 성립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전범(戰犯) 국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8ㆍ15는 1948년 남북에 분단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해방절’로 불리다가 이후 남한에서는 ‘광복절’, 북한에서는 ‘민족 해방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염치없게도 ‘종전 기념일’로 불린다. 그들은 패전이라는 용어 대신 ‘종전’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 전력을 은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승전 기념일’로 부른다.
일왕 쇼와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 청사 2층에서 이른바 ‘옥음 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 선언이지만,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 조서’는 8백 15자(字)로 되어서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8ㆍ15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노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것이었다. 말과 글과 역사를 빼앗기고, 성씨를 비롯해 전통과 문화를 박탈당하고, 인력과 자원ㆍ물산을 수탈당하는, 민족 말살 바로 그것이었다.
(출처: InSapphoWeTrust(http://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일제에 짓밟힌 시기는 말이 36년이지, 1910년 8월 29일 국치일로부터는 만 34년 11개월 보름만이고, 1876년 2월 2일 강압에 의해 체결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으로부터 기산(起算)하면 69년, 실질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으로 치면 40년이다.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광명이고 부활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훼절하지 않고 광복의 날을 맞았던《소설 임꺽정》을 썼던 홍명희는〈눈물 섞인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함석헌은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술회했지만,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일제와 싸우면서 해방을 준비하였다. 특히 김구ㆍ김규식 등이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의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한편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지 이틀 후에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광복군은 미군 OSS부대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할 날을 기다리며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때를 놓치고 말았다. 김구 주석이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환호ㆍ감격보다 “우리가 크게 한 일이 없는데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개탄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김구가 우려한 대로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데다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해방의 날은 왔으나 완전한 해방이 되지 못하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고사 그대로였다. 친일파들에게는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봄 잠에 취해 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할 것이다.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채 “그날이 오면”을 애타게 그리다가 젊어서 숨진《상록수》의 작가 심훈의〈그날이 오면〉에는 모든 항일 운동가와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으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8ㆍ15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채택한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구현하는 민주적 삼균주의의 실천이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분단주의자, 친일파, 외세추종자들이 주류가 되고, 독립 운동가ㆍ민족주의자ㆍ남북협상파는 암살되거나 제거되고 말았다. 변통세력이 정통세력을 짓밟고 이 땅의 주역이 된 것이다. 따라서 8ㆍ15 해방정신은 실종되고, 반 8ㆍ15 세력이 득세하는 민족모순ㆍ역사모순이 자리잡게 된 셈이다.
해방 70주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3대 미해결의 모순이라면 △친일파 미청산 △분단 미해결 △군사독재 잔재 미청산이라 할 것이다. 이런 잔재들이 상호연대ㆍ연계하면서 한국사회의 주류가 되고 세습을 하면서 역사를 오도하고 민주주의를 짓밟는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나라의 정치는 그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지난 8년 여 동안 저지른 반통일, 반민주, 반서민의 퇴행은 세계 제2위의 대학진학률, OECD 가입국가의 형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반유신 항쟁으로 박정희,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을 몰아낸 한국 국민이다. 민주화와 평화통일은 여전한 국민적 과제가 되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크게 불렀던〈해방의 노래〉이다.
해방의 노래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하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조선음악동맹 찬, 김순남 작곡)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시정부 돌아왔지만 ‘개인 자격’ (0) | 2015.01.30 |
---|---|
해방군 또는 점령군, 미군정 3년 (0) | 2015.01.23 |
여운형의 암살과 건국 준비위원회 (0) | 2015.01.19 |
누가 38선을 그었는가 (0) | 2015.01.14 |
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 현재적 의미 (0) | 2015.0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