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4)
여운형의 암살과 건국 준비위원회
포악한 일제식민체제는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인도나 베트남 등 아시아국가가 자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데 비해 한국은 중국 등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그만큼 일제의 지배가 강폭했던 것이다.
예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박헌영 등이 지하에서 항일 운동을 계속하고, 1919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고 국내에 밀사를 보내어 대규모 항일 시위를 준비토록 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여운형이 일경에 피체되어 국내로 들어와서도 항일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사장 때에는 베를린 올림픽 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사가 폐간되는 고초를 겪었다.
1929년 체포되어 용산역에 내리는 여운형(출처: 동아일보(1929))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1944년 8월 10일 서울 삼광 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지방 조직에 이어 10월에는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 동맹, 1945년 3월에 건국 동맹 산하에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북경과 연안 등지에 연락원을 파견하여 임시 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등 해외 혁명 단체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패망의 소식을 접한 조선 총독부는 8월 15일 아침 엔도 정무 총감을 통해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의 책임을 제의하였다. 이에 그는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① 전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② 집단 생활지인 경성(서울)의 식량 8, 9, 10월 3개월분을 확보하라.
③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말라.
④ 조선에 있어서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을 말라.
⑤ 전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라.
엔도는 이 제의에 동의했고 여운형은 해방 공간의 막중한 시기에 치안 유지의 책임을 맡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밀리에 조직했던 건국 동맹이 뒷받침되어서였다. 여운형은 해방 당일 홍증식에게 <매일신보>를 접수해 조선 독립을 알리는 호의를 찍어 알리도록 하고, 여운홍에게 경성 방송을 접수해 조선 독립을 방송토록 하는 한편 건국 동맹원을 소집하여 치안대 조직, 식량 대책 위원회 조직 등의 임무를 부여하고, 안재홍과 함께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하였다.
건준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좌우익의 인사를 고루 실무 부서 책임자로 선임했다. 3대 강령을 내세웠는데, 첫째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 둘째는 전체 민족의 정치적ㆍ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셋째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운형은 9월 4일 미군의 진주에 앞서 건준을 모체로 국내 혁명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 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한 달 만에 전국에 145개의 지부가 결성될만큼 국민의 지지가 따랐다. 미군 환영을 위해 여운홍ㆍ백상규ㆍ조한용을 건준의 대표로 인천에 보내 하지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9월 2일에 맥아더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ㆍ소 양국의 분할 점령 정책을 발표하고 9월 7일에는 미 극동 사령부가 남한에 미군정의 실시를 선포하면서 인민 위원회 등을 불법 단체로 적시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 전국 인민 대표자 회의에서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중, 9월 7일 6인조 테러단의 습격을 받았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적대시하고 그의 조직을 불법 단체로 인정하면서, 잇따른 테러에 시달렸다. 인민 위원회 조직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여운형의 일대 정치적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미군정 당국이 여운형과 건준을 적대시한 데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 미군은 선발대를 서울로 보내 총독부의 항복 절차를 밟도록 했다. 총독부는 이 선발대 요원들을 최고급 호텔에서 영접하면서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라는 날조한 문건을 만들어 건넸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여운형에게 과도기적인 치안 유지를 맡겼는데, 그가 건준을 조직하는 등 독립 정부 수립 쪽으로 활동하자 그를 배척하는 정보를 미군측에 제공한 것이다. 대신 친일경력의 한민당 인사들을 미화시켰다.
하지와 미군정 수뇌부는 이 같은 총독부의 정보에 따라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친일부역자들을 군정의 요직에 중용하고 한민당을 지원하였다. 반면에 임시정부와 건준→인민위원회 등은 불법 단체가 되고 말았다.
에드가 스노가 지적한대로 아무런 준비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 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 것이다. 건준은 여운형, 안재홍을 비롯하여 김병로, 이인, 허헌 등 우익 및 중간 노선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고, 중앙 위원회에도 김준연, 이용설, 김약수, 이강국, 김동화, 최용달 등을 임명하여 좌우 각 계열 인사들이 고루 포함되었다.
송진우ㆍ장덕수 등 우파 세력은 건준에 참여를 거부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충칭의 임시 정부 봉대를 내세웠다. 임시 정부의 환국을 기다린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중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개인 자격으로 귀국케 하면서 돌변하여 한민당을 급조하고 미군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자신들의 행적 때문에 새로운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건준 참여를 주저하고, ‘임정봉대’에서 ‘미군정 봉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건준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미는 막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첫째, 건준의 조직은 진정한 민족적ㆍ민주적 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적 준비 작업이자 민족 통일 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즉 건준은 민족 통일 전선인 동시에 건국 사업의 조직적, 정치적 준비 작업 수행자였다. 이것이 건준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의의였다.
둘째, 건준은 해방직후의 치안 유지, 식량 관리, 재산 관리라는 과도적 임무를 담당했다. 이 임무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이미 건국 동맹에서 수년간 조직ㆍ준비해 온 과제였기에 체계적인 처리가 가능했다.
셋째, 결국 건준의 결성은 정세에 비추어 합리적이며 순리적이었다. 일제 패망 뒤 자율적인 정부 수립이 당면과제였던 상황에서 건국의 준비조직인 건준의 결성은 민족적 요구를 자연스럽게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건국 동맹이라는 조직과 준비된 역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결국 동맹은 건준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될 수 있었다(정병준,《몽양 여운형 평전》).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미국은 일본 점령에 대비하여 2천 명의 행정관을 선발하여 교육시키고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었고, 오히려 자생적인 건준과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과오를 저질렀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점령 정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책략이었겠지만, 전범국 일본에 비해 한국의 차별 정책으로 피해는 오롯이 한민족이 겪게 되었다.
해방직후〈여운형론〉을 쓴 이강국은 “일본제국주의의 포악한 위협과 교묘한 회유 속에서도 권위와 절도를 지키면서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로서의 전술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평가가 아니더라도 여운형의 독립 운동과 해방 후 건준 조직, 김규식과 좌우합작 등은 통일 정부 수립에 큰 기여가 될 뻔했는데, 친일세력과 미군정에 거부당하고, 그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건준의 이상도 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게 되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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