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5)
해방군 또는 점령군, 미군정 3년
일본이 미국에 공식 항복한 날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국 군함 미조리호 함상에서였다. 일본 정부 대표 시게미쯔 가오루, 일본군 대표 우메즈 미찌로우는 맥아더 장군 앞에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여 일본의 통치 권한을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 하에 둔다는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시게미쯔 가오루는 주중 일본 공사로서 1932년 4월 상하이 일왕 생일 및 전승기념행사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한쪽 다리가 잘린 장본인이다.
맥아더는 이날 연합군 최고 사령부 일반 명령 제1호로서 동아시아 각 전선의 일본군의 항복을 수락하고 그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연합국간의 지역적 분담을 발표했다. 이는 전동북아시아에 대한 국제적 역학 관계를 규정한 문서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북위 38도라는 인위적인 선에 의한 한반도가 양단되는 것이 드러났다.
일반 명령 제1호 2항은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화태 및 천도열도에 있는 일본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상ㆍ해상ㆍ항공 및 보조 부대는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3항은 “일본 대본영, 일본 본토에 인접한 제 소도,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 유구 제도,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앞서 8월 20일 미군의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웨드마이어 장군 명의의 삐라를 시내에 살포했다. 내용은 미군의 진주를 예고한데 이어, 9월 2일에는 다시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명의의 포고 삐라를 살포했다.〈남한 민중 각위에 고함>이란 제목의 ‘재조선 미군 사령관 포고 1’과 2. 3으로 계속된 포고령은 해방군이기보다 점령군적인 내용이 담겼다. “주민의 경솔ㆍ무분별한 행동은 의미 없는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이다.”, “각자는 보통 때와 같이 상업에 전념해주기 바란다.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혹은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재산 및 기설 기관의 파괴 등의 경거망동을 하는….” 따위의 협박적인 내용이었다.
이승만, 김구, 존 하지(John Reed Hodge) (출처: 서울신문)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마련한 일련의 정책과 분위기는 해방군이라기보다 점령군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냈다. 남한의 경우 9월 12일 하지 중장이 아놀드 소장을 군정 장관에 임명하고, 20일에는 군정청의 성격ㆍ임무ㆍ기구 및 인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
이에 앞서 9월 8일 남한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제1단계로 서울ㆍ경기 지역을 점령하고 7월 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ㆍ수원ㆍ춘천 등을 점령했다. 제2단계에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 지역이 확대되어 10월 10일까지 경기ㆍ강원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제3단계는 6사단에 의해 전남북 점령으로 남한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점령’이란 표현을 썼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전혀 없어서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충칭의 임시정부는 물론 여운형의 인민 공화국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 위원회,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조선인 행정 관리, 경찰을 인계받아 통치했다. 일제에서 미국으로 주인만 바뀐 셈이다.
하지 장군은 김성수 등 11명의 한국인을 군정 장관 고문으로 임명한데 이어 조병옥ㆍ장택상 등을 경찰 책임자로 임명했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지주 출신의 친일 인사들을 행정 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과거의 친일관료ㆍ경찰ㆍ지주 등 반민족적 인사들의 재등장 과정이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임시정부 인사들도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치안 유지법, 사상범예비 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악법을 폐지했으나 신문지법, 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점령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기에 발생한 대구 10ㆍ1 항쟁, 제주 4ㆍ3항쟁 등 민중 항쟁에는 친일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여 국민을 탄압, 수탈한 데서 발생한 요인이 적지 않았다. 이른바 ‘통역 정치’의 병폐도 많았다. 미군의 통역을 하면서 귀속재산을 가로채는 등 악덕 모리배가 횡행하였다.
미군정체제에서 입법 기구는 1946년 2월 14일 개원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이 효시가 된다. 미군정 사령관의 자문 기관으로 출범한 민주의원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ㆍ김규식이 선출되었고, 좌익계를 제외한 인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을 사퇴하면서 김규식이 대리 의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ㆍ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의원은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 후신으로 설립한 것이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이다. 1946년 미군정법령 제18호로 설치된 입법 의원은 민선 의원 45명, 관선 의원 4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선 의원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는데,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대부분 당선되었고, 관선 의원은 좌우합작위원회 등 중도 노선의 각계 인사가 임명되었다. 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ㆍ윤기섭이 선임되었다.
입법 의원에서 심의 제정한 법령이 50여 종이었는데 미군정은 민족 반역자ㆍ부일 협력자ㆍ간상배에 대한 특별법과 농지 개혁법 등 가장 중요한 입법은 공포하지 않음으로써 친일청산과 농지 개혁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두 법안이 사산한 것은 한민당 출신의 입법 의원들과 미 군정청 간부가 된 친일세력의 방해 때문이었다.
미군정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ㆍ소공동위원회 활동과 결렬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1946년 3월 20일 개최된 미ㆍ소공위는 미국측 수석위원 아놀드 소장, 소련측 수석위원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미ㆍ소공위는, 김구ㆍ김규식 등의 좌우합작과 남북 협상론, 이승만과 한민당측의 단독정부 수립론, 여기에 미국과 소련의 이해 대립으로 공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막을 내렸다.
1947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 총회는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여 그 감시하에 1948년 3월까지 자유 선거를 실시, 국회 및 정부 수립 후 미ㆍ소 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소련측은 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위반하는 것이며, 한국 문제는 미ㆍ소양군이 철수한 후 조선인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반대했다. 당시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유엔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거를 실시토록 결의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 13일 한ㆍ미간의 행정권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만 3년여 만에 미군정 체제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3년 동안 무소불위의 위치에서 남한을 통치한 존 하지는 1893년 6월 12일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정규 육사가 아닌 고등사관 양성소 출신으로 육군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 24군단 소속으로 오끼나와에서,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일본의 항복과 함께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선발되었다. 그와 그의 부대가 선발된 것은 한국에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물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는 주둔군 사령관으로 군림하면서 김구를 중국으로 추방하려 하는 등 한국 민족주의 세력을 적대하고, 국면을 분단 정부 수립으로 이끌어가는 주역이었다. “그의 점령 통치는 한반도에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면 그만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역사가 남긴 부(負)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정용욱,《존 하지와 미군점령통치 3년》)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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